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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Jun 24. 2020

스마트워치와 시의 페이스

오늘의다짐




달릴 때 ‘스마트워치’를 찬다. 음, 정확하게 말하면 ‘스마트워치’를 손목에 찬 상태로 달린다. 이 워치는 스마트하기 때문에 도움을 많이 준다. 당연히 달리는 데 도움을 준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페이스’를 조절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몇 km를 달렸는지, 남은 거리는 몇 km인지 스마트워치를 보면 알 수 있다. 1km를 몇 분 몇 초 페이스로 달리는 지도 알 수 있다. 장거리를 달리지 않는 사람들은 중요한 게 ‘거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먼 거리를 어떻게 달려?” 하지만 장거리를 달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페이스’다. 1km를 몇 분 몇 초 페이스로 달리는가, 가 ‘그렇게 먼 거리를’ 달리게 해준다.

오래 멀리 달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다. 자신만의 속도, 자신만의 감각. 이걸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체력이나 근력이 아니다. 자신의, 좋은 페이스를 발견한다면, 전진할 수 있다. 열심히 달린다면 찾을 수 있고, 조절할 수 있다. 그 속도를 유지하고 달리면 어느 순간 약간, 가끔은 많이? 혹은 깊이? 명상하는 기분이 든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잠기며 가라앉는 기분. 얼마든지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시를 쓰면서 내가 찾고 싶은 건 절묘한 단어, 다양한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문장 같은 게 아니다. 내 시에 걸맞은, 내가 시를 쓸 때의, 내 시 안에서의… 속도다. 단어를 단어 속에서 나아가게 하는, 문장과 문장 속에서 문장이 스스로 확장하는, 시가 자신의 생을 받아들이고 창조하는, 속도. 시를 쓰는 나도, 그걸 읽는 누군가도, 시 자체도, 명상에 잠기듯 고요히 가라앉는, 그런 속도라는 것.

그래서 나는 요즘 시 안에 담긴 이미지를 지켜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결국 시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한데, 어떤 시는 내가 썼는지조차 모르… 겠다. 이 시가 내 시라고? 놀라기도 한다. 어떻게 내가 쓴 시를 내가 잊을 수가 있지? 생각하다가, 안도한다. 내 시인 건 분명하고, 그 시가 엄청 좋아서… 어쩌면 어떤 흐름이 있고, 내가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의지를 맡기면서 써진 걸까? (내 안의 천재성은 내 안의 흐름인가!)

빨리 달려야 할까 혹은 느리게? 모르지. 언젠가 알게 되기는 할까?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지금의 나는, 시의 세부를 절차탁마하는 것 못지않게, 내 안의 ‘좋은’ 속도와 시의 언어 혹은 시 자체에 내재된 아름다운 흐름을 맞춰 나가는 게 의미 있게 느껴진다는 것. 좋은 파도를 타고 더 나아가고 싶어서, 나아가게 하고 싶어서. 음, 근데 ‘페이스’랑 별로 상관없는 얘긴 같기도… (그래서 ‘페이스’에 대해 더 생각하고, 더 써보려고 합니다!)


- 시 한 편은 몇 분 몇 초 페이스로 읽을 수 있을까?

- 모르지. 스마트하면 시를 못 읽으니까. 시는 우아한 바보들의 이야기니까.



(쓰고 지운 부분)

시를 쓰지 않는 날이 이어지면, 우울해진다. 그럴 때 밖에 나가서 달리면 기분이 나아진다. 달리기를 하지 않는 날이 이어지면, 우울해진다. 그럴 때 앉아서 시를 쓰면 기분이 나아진다. 그래서 막연히 추측하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쓰는 것과 달리는 것을 비슷한 행위로 인식하는구나. 시를 쓰고 있지 못하다면, 그래서 그 상태를 극복할 방법이 필요하다면, 달리기를 해야 하는구나. 오래 멀리 나아가면서 무엇인가 발견해 내야 하는구나. 정말 그렇게 하고 결국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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