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다짐
‘이우성’이라는 시가 있다. 내 이름이다. 시는 결국 ‘자아’의 혹은 ‘자아’에 의한 이야기니까, 시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름이 적힌 시를 쓰는 거 아닌가? 다만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다른 단어를 적거나, 숨길뿐이다. 숨기는 건 시인의 주특기라서 모든 시인이 자신을 낯설게 만드는, 그래서 스스로에게도 낯설어지는 시를 굉장히 잘 쓴다. 읽는 사람은 시인과 시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시인은(소설가도 그렇지 않아?) 거리두기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나는 나 시는 시까지는 아니어도, 한쪽 발만 살짝 걸쳐 두는 느낌? 물론 아닌 시인도 있겠지.
나는 ‘아닌’ 시인이다. 내 시는 내 얘기다. 전부 내 얘기다. 두 발 다 들어가 있다. 시적인 순간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 가끔은 아, 이런 것도 충분히 시적이지 않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중 일부를 시로 쓴다. 그런데 그중 또 가끔은 아, 이런 것도 시적이긴 한데, 시로 쓰면 내가 창피할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굳이 뭐, 이런 것까지 시로 기록해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굳이 안 써도 되는 얘긴데, 시적이라고 느낀다면, 어? 그거야말로 시 아니야?라는 생각도 든 것이다.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네, 나. 지금.
아무튼 그런 상황을 시로 쓰고 제목을 당당하게 내 이름으로 적는 게 당시 나는 매우 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우성’이 탄생했다. 시집 출간 전에 원고를 모아 대학 은사님께 보여드렸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굳이 넣어야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몇십 년 후에 자네 아이들이 볼 수도 있을 거고,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볼 거고…” 그래서 내 마음은 확고해졌다. 시집에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안 필요한 것도 아닌, 뭐 그런 시란 거잖아! 아,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시다! 모든 시를 그렇게 쓸 필요는 없지만 내가 쓰는 많은 시가 그런 시면 좋겠어,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어떤 시를 쓰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음, 처음은 아닌가? 그럼 두 번째!
궁금하지? 그래서 여기 전문을 적어 둠.
- (어딨지?)
- 이우성 첫 시집 가지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