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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Jul 12.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해

비가 잠시 멈추었다. 석촌 호수 카페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잠실역으로 내려가 물품보관소에 짐을 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15km를 뛰려고 했는데, 물웅덩이를 자꾸 밟는 바람에 러닝화가 젓어서 발가락에 갑피가 쓸렸다. 통증을 참고 더 달려서 8km를 채웠다. '채웠다'는 표현이 올바른지 아리송하다. 아파서 더 못 뛸 것 같았는데, 그래도 8km는 달려야 한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채웠다'라고 표현한 것 같다. 왜 8이었을까, 뛰고 나서 GPS 지도를 보니 알 것 같았다. 어떤 사실은 그냥 느낌으로 만들어진다.

아픈데, 더 달리면서, 나는 왜 달리지,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이유들이 떠올랐다. 그걸 여기 다 적는 일은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결국, 결론은, 멈추고 싶지 않다는 것.


멈추고 싶지가 않아.


생각이 자연스레 요즘하고 있는 고민들로 옮겨 갔다. 사실 고민이라기보다는 열등감에 대한 것이고, 남아 있는 자존심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의문이기도 한 것. 좋은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좋은 작가가 된 것 같지 않다. 치열하게 글을 썼다. 에디터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최고가 됐다고 느낀 적도 있다. 특히 에디터로서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최고가 되었던 것 같다. 아니야, 되었어. 그런데 지금 나는, 좀 초라한가? 시인으로서도... 그런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적을 수 있는 게 없다. (어쩌면 이건 나의 오만일 거야.)


그러나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이,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내가 내 글을 온전히 쓸 수 있을 때라고 믿고 있다. 더 이상 열렬한 호명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내 글에 응답하는 사람이 적거나 없을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조금씩 내 문장을 적는 것이다. 이 까만 날들을 별들의 언어로 밝히는 것. 시도, 산문도, 그 무엇도 아닌 모든 문장들도.

만약, 내가, 호언해 왔던 것처럼, 최고의 에디터였고 꽤 괜찮은 시인이었다면,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글은 안 써도 되잖아. 시도, 굳이 더 써야 할 이유가 뭔데?


오늘 달리며 그 대답을 알았다. 멈추고 싶지가 않아.

문장은 나의 본질이고, 쓰는 것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나를 증명할 수 없어.


이제 양손에 아무것도 없다. 한때 나를 채웠던 열망들, 내 걸음을 따라 쏟아져 내리던 빛들은 사라졌다. 이 빈 마음이 차고 쓸쓸하고 좋은데, 좋은데, 그러니 더 써보는 수밖에,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을 향해 밀고 가는 수밖에.

언젠가 이 말을 해주었던, 박상륭 선생님이 보고 싶은 밤.


8km, 50:42, 6:20, 석촌호수




(여름에 발표한 시)


그런 거죠 뭐




와 구름 좀 봐 예쁘다

친구가 진부하게 그저 예쁘다고 말했을 때

등 뒤에서 총을 꺼내 걔를 쏴 버렸어

아냐 사실은 칼을 꺼내 손가락을 잘랐어


비는 너무 먼 데서 온다

상상으로 누군가를 해할 때

모든 일에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일들을 생각하면 오늘과 내일 내게 즐거운 일이란 지난주 보던 드라마를 이어 보는 것

슬픈 일은 기대했던 것보다 전개가 지루한 것

아, 응원하는 야구팀이 진다 그건 자주 있는 슬픈 일


될 대로 되라지 라고 실망하는 일 역시 흔해서

나는 언제나 독특하게 실망하고 싶었는데

돌아보면 이유 없이 오래 살았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서 친구들이 웃으며 날아가는 걸 멀뚱히 보며 5세 우성이는 말했었다

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일까 아직 죽기도 전에

무병장수하였구나 돌아보면

막상 돌아보면 기억나는 건 악당1과 악당2 그리고 죽어버릴 행인들


슬픔이 뭘까요 무엇이기에 찾아올까요

자신의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기에 아빠와 엄마는 늙었으며 뇌졸중 후유증으로 종일 드라마를 보는 아빠는 하루에도 열 번씩은 운다 소리 내어

왜 우는지 모르고 울 때 그건 슬픔을 이해 못 해 슬픈 걸까


우성이가 눈물이 많은 건 나를 닮아서야 아빠가 말한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빠의 눈물을 닦으며 그래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말한다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웃으려고 하면 웃는 건 쉽다 라고 시에 썼다 그 시가 실린 두 번째 시집은 실패했고

일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시집을 낸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나는 성공할 시집을 출간하고 싶다

아빠가 나를 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죽기 직전까지 맞고 싶다 나도 44세지만

야구팀은 내일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비들이 손가락처럼 떨어져 꽂힌다



(문학들 202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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