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편 (1)
둘째의 입대를 앞두고 1월 12일부터 1월 18일까지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제주도를 먼저 여행하고, 이모들이 있는 광주로 나와 이모들이 준비해 둔 일정을 따라 여행했다.
촘촘히 계획을 짜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의 느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운전대를 잡은 아빠가 이끄는 대로. 제주도 해안가를 가볍게 스케치하듯.
1. 해안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
내도. 알작지 해변. 바닷가에 갈 때면 항상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과 그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 그리고 바다색이다.
처음엔 해가 얼굴을 많이 내밀지 않아 검푸른 바다를 마주하였다. 그 색과 어울리는 검은색 현무암, 다른 바닷가에서는 볼 수 없는 암석이라 제주도에 와 있는 것을 실감하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선명한 파랑색깔 하늘과 흰 구름, 하늘색을 닮은 바다색도 살짝 보여 주었다.
곽지 해수욕장. 바닷속에 우뚝 서 있는 풍력 발전기. 위풍당당해 보였다. 옅푸른 색과 에메랄드 빛의 바다색이 눈부신 햇살과 함께 맑고 아름다웠다. 바람이 일어 세차게 몰려오는 파도를 보면 늘 빨랫비누 거품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렁찬 파도소리에는 ‘뇌성 같은 찬송소리’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바다를 뒷 배경으로 해서 우리 네 사람이 예쁘게 웃는 모습으로 나온 사진도 맘에 들었다.
2. 한림수목원에서 만난 식물
아열대식물원에서 가장 먼저 우리는 맞이하는 식물은 부겐빌레아.
이 식물을 처음 본 건 20여 년 전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였다. 묵었던 숙소의 식당 입구에 격자로 만들어진 캐너피를 타고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진분홍색이 너무 강렬하고 아름다워 꽃잎 하나를 책갈피로 영어찬송가집에 넣어 두었었다. 아직도 그 하트 모양의 얇은 꽃잎이 압화 책갈피로 남아 있다. 잘못 만지면 바사삭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꽃잎.
사실 그 꽃잎이 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다. 부겐빌레아 꽃은 그 진분홍색 포엽에 둘러싸여 정중앙에 피어난 작은 하얀색 꽃이고, 이 진분홍색은 포엽이라고 불리는 데 하나의 꽃 또는 꽃차례를 안고 있는 소형의 잎이라는 사실.
이 잎이 꽃이든 잎이든 나는 이 꽃잎을 정말 사랑한다. 길을 가다가도 우연히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부겐빌레아를 발견할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워싱턴 야자수. 한림 수목원을 1971년에 조성하기 시작하였다는 데, 이 야자수의 나이는 이곳 수목원의 나이와 같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하늘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게 하는 키다리 아저씨. 작은 씨로부터 시작하여 긴 세월을 이곳에서 함께 하며 저렇게 높게, 건장하게 자라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장하다고 느꼈다. 워싱턴 야자수, 파이팅!!
감귤나무. 유자나무. 자몽나무. 감귤농장에 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여러 종류의 감귤나무를 볼 수 있었다. 놀란 것은 귤나무에 달린 귤이 어찌 그리 큰 거야? 보기만 해도 묵직하게 보이는 둥근 덩어리들이 주렁주렁 많이도 달렸다. 다음 날 간 동백수목원에서 다시 만나서 반가웠던 나무들.
따뜻한 날씨에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면서 함께 웃고 대화 나누는 시간. 둘째 입대 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이 특별한 시간이 좋았다.
3. 제주현대미술관
마침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 전시가 진행되고 있어 미술을 전공하는 막내가 무척 반가워하며 가자고 한 곳이다. 전시를 둘러보며 둘째가 영감을 많이 얻었다고 하였다. 초상화, 정밀화처럼 대상을 똑같이 그릴 수는 없지만,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방식대로 작품을 그려 낼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중2 때 그린 일출 그림처럼.
4. 송악산
제주도 최남단에 있는 산이라고 한다. 산이라고 하지만 깎아지른 해안 절벽 위로 산책길이나 다름없는 것 같은 잘 단장된 길을 따라 쭉 걸어가면 맞은편 바다 위에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둘째가 하는 말, "이렇게 걷는 게 좋아요. 여유롭게."
"그래, 우리도 좋다. 너랑 함께 걸어서 좋다."
아이들이 어릴 때 왔으면, 산보다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박물관을 찾아다녔을 텐데, 성인이 되어 자연 속에서 '걷기의 맛'을 아니 참 대견하다.
5. 천지연 폭포의 청둥오리
폭포도 좋았지만, 우리가 사랑한 건 물 위에서 헤엄치고 있는 청둥오리 떼. 보면서 아빠도 애들도 황선미작가의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청둥오리 ‘나그네’를 언급했다.
한 쌍의 청둥오리 부부가 나란히 헤엄쳐 다니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아기 청둥오리들이 부지런히 발길질하며 자기네 삶의 방식을 익히고 있는 모습도 귀여웠다.
동심으로 돌아가 계속 쳐다보고 있는 막내의 뒷모습에 <마당을 나온 암탉>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눈물 흘리던 일곱 살 막내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특별히 큰 애가 쓴 ‘청둥오리’라는 제목의 시가 떠올라서 더욱 애착이 생긴다.
지난여름 큰 애가 제주도에서 3주를 머물며 휴식할 때였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예보가 있었던 어느 날 바다가 내다보이는 어느 시인의 카페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무화과 빵과 창밖에 검은 암석위에 서 있는 청둥오리를 보며 시상이 떠올라 썼다는 시.
우리가 사랑하는 시이다. 작년 추석 때 가족들이 모였을 때, 둘째가 형의 시를 낭송해 보겠다 했다. 평소 웃기는 캐릭터인 둘째가 시를 낭송한다 하니 모두 웃음을 참느라 힘들어하면서도, 한 구절 한 구절 낭송될 때 차분히 귀 기울이던 그 시.
잠깐 감상해 보자.
David Do
청둥오리는 알고 있다.
제 깃을 움켜쥐는 바람의 분노를
제 부리에 스며드는 빗방울의 온도를
초연히 흘려내는 인내를
붉은빛이 침전하는 낙조의 시간대를
제 발 밑에 드러날 단단한 암초를
이 여름 무화과는 과실 안에 꽃을 피워냄을
소중함을 품 안에 간직할 수 있는 섬세함을
조급함을 발길질해 앞으로 나아갈 여유의 물장구를
청둥오리는 그 자리에서 오늘도,
계절의 박음질에 온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