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검(变脸)

- 서울 춘천 휙휙

by 미나뵈뵈

“이번 역은 남춘천역, 남춘천역입니다. 내리실 고객께서는 큐아르 게이트를 이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금요일 밤, 바쁜 발걸음들을 따라 하차 태그를 하고 역 밖으로 나온다. 남편의 차가 기다리고 있다. 집을 향해 출발! 역 주변의 상가들은 12시가 넘은 시간에도 간판에 불이 환히 켜져 있다. 서로 만나 먹고 마시며 회포를 풀고 있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우리 집 쪽으로 가는 길로 들어설수록 도로 양옆 풍경은 어둑어둑해진다. 키 작은 가게의 불은 대부분 꺼졌고, 가로등 불빛도 그리 밝지 않다.

1시간 15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높다란 빌딩 사이로 비쳐 나오는 불빛들 가운데 서 있던 나는, 1시간 15분이 지난 후 주중 5일 동안 익숙했던 장면들과는 180도까진 아니더라도 100도 정도 다른 장면을 마주한다.


“이번 역은 용산, 용산역입니다. 이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입니다. 모두 하차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두고 내리시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시고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저녁, 다시 내 눈앞의 장면이 바뀐다. 한산한 도로와 집 뒤의 산책로, 기차 창밖으로 보였던 초록색으로 덮인 산과 잔잔한 강,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어느새 사라지고, 철로, 전선, 고층 빌딩, 현란한 네온사인, 연세 드신 분, 젊은 사람, 외국인 등 사람들로 가득한 장면이 펼쳐진다….

나는 마치 중국에서 *변검(变脸)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이 된 듯하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변겸 배우의 얼굴이 휙휙 바뀌듯이 내 눈앞의 장면이 자주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서울 풍경/춘천 풍경, 서울집 공간/춘천집 공간, 서울집 살림/ 춘천집 살림, 서울에 있는 교회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춘천에 있는 교회 형제자매들과의 만남….


계절이 바뀌고 기온이 바뀌면 모드를 바꿔주어야 하는 냉난방 겸용 에어컨처럼, 어느새 내 몸은 장면의 전환에 따라 즉각 즉각 모드를 바꾸는 데 최적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관객이 아니라 장면에 따라 얼굴을 바꿔 연기하는 변검(变脸) 배우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격주로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남편의 직장은 춘천에, 나의 직장은 서울에 있다. 주중 5일을 떨어져 지내다가 주말이 되면 남편은 자차를 운전해 서울로 오고, 내가 춘천에 갈 때에는 ITX 청춘 열차를 이용해 오간다. 이 열차가 있어 참 감사하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해 주어서, 자연과 문명 사이를 수시로 오갈 수 있게 해 주어서, 무엇보다도 1시간 15분만 인내하면 남편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사람마다, 가정마다 다 처한 상황이 다르다. 그 상황으로 인해 저마다의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서울-춘천을 오가는 나에게 어떤 사람들은 늘 이동해야 하니 힘들겠다고 하며 걱정해 주고, 어떤 사람들은 좋겠다, 춘천처럼 공기 맑고 아름다운 도시를 자주 오가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어떤가? 이 생활방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 그렇지 않다고 쉽게 대답하지 못하겠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서울-춘천을 오가는 이 삶이 어느 날 나에게 찾아왔고 내가 그 삶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중간에 이 삶의 방향을 바꿔보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현재 나는 연어의 회귀처럼 시작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이 삶을 또 한 번 받아들였고, 그에 맞춰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이 생활에도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있다.


좋은 점이라면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자녀 셋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점이다. 각자 기숙사나 따로 방을 얻어 생활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매 끼니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나 혼자 있는 외로움 등을 덜어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고, 밥은 밖에서 먹더라도 엄마가 있는 집의 온기를 느끼며 대학 생활하는 것은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가?


누군가는 홀로서기를 배워야 할 시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자녀들이 이렇게 엄마와 생활하고 부모의 돌봄과 관심을 받는 것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고 감사히 여긴다. 때가 이를 때까지는 이 생활을 조금 더 유지할 듯하다.


엄마와 자녀들이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아빠가 홀로 지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아쉬운 점이다. 주말마다 만나긴 하지만 날마다 얼굴을 보고 끼니를 같이하면서 느끼는 식구로서의 유대감, 매일 함께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과 위로, 서로의 필요를 채움 등에서 부족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말을 오고 가는 데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서울이든 춘천이든 한 곳에 머물러 살 때에 비해 다녀볼 곳, 만나 볼 사람, 받을 수 있는 혜택 등등에 제한이 있다는 점이다.




좋은 점이든 아쉬운 점이든 따져 보면 위에 언급한 것들 외에도 무척 많을 것이다. 경제적, 시간적, 정서적, 체력적인 면 등등에서. 그러나 그다지 하나하나 따지거나 계산해 보고 싶지 않다. 모두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생활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서울-춘천, 춘천-서울로 휙휙 장면의 전환을 경험하며 그 장면에 맞춰 살아가고 있는 나는 변검(变脸)의 관람객이면서 동시에 배우이다. 나는 이곳에 있다가 어느 순간 저곳에 있는 사람, 자연의 혜택도 누리고 문명의 혜택도 누리는 사람, 여기서도 필요한 사람, 저기서도 필요한 사람이다. 때론 정신없기도 하지만 매우 흥미로워 몰입하게 되는 나의 삶을, 관객석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무대 위에서 펼쳐 내고 있기도 하다.


항상 움직이고 장면에 맞춰 얼굴을 자주 바꿔주어야 하는 나의 삶이여, 파이팅!!



* 변검 变脸 / biànliǎn

중국 간자체를 번자로 바꾸면 變臉이다. 臉은 "뺨 검"이라는 한자이지만 중국어에서는 일반적으로 "얼굴"을 뜻한다. 따라서 '얼굴이 바뀐다'는 뜻이다.


중국 쓰촨성 지방의 전통극 천극(川剧)에서 볼 수 있는 연기 기법. 중국 전통 복장의 배우가 가면에 손을 대지 않고 순식간에 휙휙 바꾸는 가면술이다. 이 기술을 연기하는 사람을 '변검대사(变脸大师)' 또는 '변검배우(变脸演员)'라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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