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작권은 그녀에게
꽃과 꽃말이 적힌 OO 수노아껌, 반짝반짝 광택 있는 OO 아카시아껌, 노란색 OO 치클쥬시 껌, 빨간색 OO 들국화껌, 인삼 색깔의 OO 인삼맛껌, 금박 OO 알로에껌, 첨성대가 그려진 70원짜리 대한민국 우표, 분홍색 OO 난 추잉껌.
색깔도 무늬도 다양한 그 시절 유행했던 껌의 껌종이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예쁘게 도배되어 있다. 남은 여백에 동기부여를 위한 문구나 명언이 적혀 있고, 맨 뒤쪽에 자작시와 나에게 쓴 편지가 적혀 있다. 비닐 덮개 안쪽엔 내가 좋아했던 가수가 마이크를 들고 서 있는 사진 한 장, 자습서에서 뜯어낸 듯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넣어져 있다.
나의 오래된 소장품 중의 하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12년간 한국을 떠나 있다가 작년에 귀국하자, 언니가 택배 한 상자를 보냈다. 상자 안에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쓴 색 바랜 일기장과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때까지 쓴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그 사이에 내가 쓰지 않은 이 한 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A6 크기의 작은 일기장이다.
매 장 정성스럽게 꾸며 나에게 선물한 친구야!
저 택배상자를 열어 옛 흔적들을 둘러보면서, 네가 준 일기장을 넘기면서 너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솟아올랐더란다.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니?
1988년 2월, 너와 나의 고향 해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현재까지 너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30년도 훌쩍 넘은 시간 동안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너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무심함으로 점철된 시간이었구나. 미안하다. 요즘따라 네가 무척 보고 싶다. 너를 꼭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다. 그때는 너의 정성을 지금만큼 느끼지 못했었던 것 같아 미안하고, 지금 느끼는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다.
키가 꽤 크고 마른 체형에다 캔디처럼 하얀 얼굴에 주근깨가 약간 있었던 친구, 머리카락도 살짝 연갈색이라 서양인 같은 느낌을 주었던 친구야! 똑똑하고 솔직하고 유머 감각과 재치를 지녔던 친구야! 내가 이쪽 산봉우리에서 외치니, 네가 있는 그쪽 산봉우리에서 대답해 줄래?
"어이, 옛 친구! 오랜만이구먼. 나 여기 있네."라고.
네가 적은 문구들을 되뇌어 본다. 이제 보니 중3 시절, 너는 인생의 묵직한 주제들: 공부, 성공, 고난, 사랑, 우정, 승리, 시간, 인간관계, 신앙, 책임 등등에 관해 꽤나 고민했었던 것 같아. 이렇게 세월이 흐른 후에, 우리 다시 만나서 이 주제들에 대해 대화 나눠보면 어때? 저 일기장에 쓰여 있는 문구 중에 어떤 말에 가장 공감하는지, 너의 삶에서 어떤 말이 가장 힘이 되었는지...
친구야, 너의 정성 어린 선물의 대미를 장식한 너의 자작시를 음미해 본다. 넌 훌륭한 시인이었구나! 네가 쓴 시의 제목 기억하니? ‘건배’ 야. 우정의 술을 마시자고 시작하고 앞으로 우리가 걸을 아름다운 인생을 잔에 담아 마셔보자고 권하네. 시간이 흘러 그 술이 공기로 변하는 한이 있어도...라고 마무리 짓고 있어. 원문을 다 공개하지 않는다. 이 시의 저작권은 너에게 있고, *공표권 또한 네게 있으니...
(* 저작권법 제 11조 (공표권) 저작자가 그의 저작물을 공표하거나 공표하지 아니할 것을 결정할 권리, 국가법령정보센터)
네가 말한 그 우정의 술이 증발하여 공기 중에 퍼져 나갔나 봐. 굽이 굽이 세상 곳곳을 여행하다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하늘 아래, 내 입술 앞까지 닿은 것 같아. 내가 들이마셨더니 너와 나눈 '우정'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을 느껴. 너를 만나서 함께 이 시를 읽고 싶다. 우린 즉시 타임머신을 타고 중학생 소녀들로 돌아갔다 오게 되지 않을까? 이 시를 쓸 때의 너의 마음속도 들어갔다가 오지 않을까? 보고 싶다, 친구야!
친구를 찾습니다!
저에게 멋진 선물을 건네고,
'건배'라는 시를 창작한 문 OO 님.
이 글을 보시면 꼭 저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