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반쪽과 겸손을 가르쳐준 통증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닐 봄을 기다림

by 민비

차 안에 오렌지 반쪽을 넣어 두었습니다. 문을 열 때마다 은은한 과일 향이 스며 나오면 좋겠다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었지요.

처음에는 정말 그랬습니다. 차를 탈 때마다 상큼한 향이 살짝 퍼져 나왔고, 그 향기는 하루의 시작을 맑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보니, 그 오렌지는 수분이 다 빠져나간 채 말라있었습니다. 향기는 이미 사라졌고, 남은 것은 어딘가 푸석하고 텁텁한 냄새뿐이었습니다.


나는 마른 오렌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 안의 감정들을 자르고 또 잘라 어딘가에 밀어 넣어 두곤 합니다. 어떤 마음은 과감히 버리고, 어떤 기억은 구석에 접어두고, 어떤 슬픔은 들킬까 봐 조용히 숨겨 두기도 하지요.

그러다 문득 돌아보면, 그렇게 잘라 놓았던 마음의 조각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먼지처럼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안에 남겨진 '반쪽짜리 오렌지'들을 하나씩 꺼내 보기로 했습니다. 처음 잘라낼 때는 모양이 다 비슷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어떤 것은 너무 바싹 말라버렸고, 어떤 것은 아직 덜 마른 채 축축하게 남아 있더군요. 뒤섞인 마음들을 골라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부려 쓸데없이 누적된 너무 많은 오렌지들 가운데, 모양이 예쁘게 자리 잡은 처음의 순수했던 마음 하나와 가끔은 뜬금없이 뒤적거릴 그리움, 그리고 언제든 찾아가도 스스럼없이 반겨주는 우정 몇 개를 마음 한편에 고이 쟁여 두었습니다. 아마도 그것들은 내가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삶의 진심일 것입니다.


며칠 동안 봄이 온 듯 따뜻하더니, 오늘은 하늘이 희끄무레해지며 비를 뿌립니다. 요즘 미세먼지가 가득해 산이든 거리든 전부 뿌옇게 보이는데 이 비가 먼지들을 깨끗이 씻어주길 바라며 밖으로 나섰습니다.


잠시, 유리창 너머로 따스한 조명이 스며 나오는 카페 앞에서 서성이는데 마음이 뒤숭숭할 때 즐겨 듣던 잔잔한 멜로디의 올드팝송이 거리를 돌아 골목으로 빠져나갑니다.

환절기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인후통으로 인해 처방받은 약봉투를 가방에 넣으며, 나는 골목 끝에 있는 오래된 약국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큰 길가로 나와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봄의 기운이 섞여 있는 듯한 오후였습니다


그때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더니 종이가방을 한가득 들고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중년 여인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건강한 웃음소리와 경쾌한 몸짓을 보니 평범하게 걷고, 웃고, 움직이는 것들의 소중함이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면 왜 저렇게 여자들끼리만 몰려다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인생을 이만큼 살아보니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참, 손이 많이 가니까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반쪽짜리 오렌지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지난겨울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빙판길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왼쪽 손목뼈가 부러졌다고 합니다. 이제 막 깁스를 푼 지 일주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다리가 골절되어 오랫동안 고생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 아픔을 잘 알기에 무척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리를 다쳐 두꺼운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던 그 지루하고 답답했던 시간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무력감으로 인해 오랫동안 허우적대던 나날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사고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오고 '아차' 하는 순간, 순식간에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그 순간에는 아픈 것보다, '이게 정말 나에게 생긴 일인가?' 하는 당혹감이 먼저 찾아옵니다. 다른 이에게 생기는 일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피조물인 인간일 수밖에 없으며, 내 힘으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어떠한 운명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당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무능해서 상심이 더 깊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이 너무 춥거나 더울 때면 여전히 사고를 떠올리게 하는 근육의 찌릿함은, 유한한 인간이 늘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뼈가 붙고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 마음에도 회복을 위한 기다림이 필요하며 그것을 감당할 힘은 '참을성과 내려놓음'임을 머잖아 친구도 곧 알게 되겠지요.


“후유증 생기지 않게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재활도 열심히 해.”


우리는 날이 따뜻해져 벚꽃이 필 때쯤 얼굴 한번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꽃을 함께 보며 걸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그래도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남쪽에서는 연일 꽃소식이 들려오고, 며칠 전 언덕배기에 하얀 매화가 핀 걸 보니 곧 마음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닐 날이 오겠지요.

어서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