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만난 출중한 사람, 해진 씨

수다 한 컵에 거품 낸 추억들을 듬뿍 올리기

by 민비

여의도에 있는 복합쇼핑문화공간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주로 영등포나 신촌에서 만남을 가졌다면 요즘은 여의도에서 만나는 일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교통이 편리하고 외식과 쇼핑과 문화를 한 곳에서 다 해결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전 11시에 여의도역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브런치로 햄버거를 먹기로 했습니다. 영화 <왕과 함께 사는 남자>의 상영시간이 정오라서 시간이 좀 빠듯하긴 하지만 이른 점심으로 백화점 5층에 있는 햄버거집을 찾았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음료와 버거를 주문한 후, 우리는 손님이 뜸한 시간이라 여유로운 4인용 자리에 앉아 식탁에 종이냅킨을 깔고 진동벨을 올려놓은 후 어서 벨이 울리기를 기다립니다.


수제라서 그런가,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한입 먹을 때마다 갓 구운 빵 사이에서 고기패티와 채소가 잘 어우러져 소스 향을 풍기며 입안 가득 채워진 수제버거는 참 맛있습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금방 웃음이 터지는 좋은 친구와 함께라서 더 그렇지 싶습니다.


잠시 후, 우리는 서둘러 지하 3층에 있는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키오스크로 티켓발권을 할 때마다 자꾸 오류가 납니다. 전화번호를 입력하면 마지막 숫자가 안 눌리고, 아무리 예매번호를 눌러봐도 숫자가 제대로 인식이 안됩니다.

할 수 없이 마지막 방법으로, 캡처한 큐알코드를 휴대폰 갤러리에서 불러내어 기계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대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리던 종이티켓이 나옵니다. 겨우겨우 간발의 차이로 늦지 않게 번호를 찾아 중간열 가운데 자리에 착석했습니다.


광고가 꽤나 길어 지루해질 무렵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고, 우리는 잠시 현실을 잊고 강원도 영월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의 촌사람이 됩니다. 같이 웃나 싶으면 어느새 마음이 절절해지고,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가 또 안타깝기도 하며 한 어린 임금의 스토리에 깊이 빠져들며 두 시간 여를 눈을 못 떼고 집중하며 관람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쉽게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극장을 빠져나오며 특히 '유해진'배우 이야기를 한참이나 했습니다. 그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펼쳐지는 자연스러움과 익살스러움. 그의 출중함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주변에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사람', 그것입니다.


나는 특히 무를 통째로 베어 먹고 거들먹거리며 허세를 부리는 장면에서 예전 어릴 적 고향에서 흔하게 마주치던 동네아저씨들이 떠올라 배꼽 잡게 웃었습니다.

좋은 연기란 혼자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서로 조화를 이뤄 잘 어울리며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오래도록 기억될 따뜻함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우리는 다시 자리를 옮겨, 여의도역 지하 북카페에서 고운 황금색 거품인 크레마가 가득한 아메리카노와 싱그러운 연둣빛 거품을 품은 말차라테를 사이에 두고 앉아 영화 얘기를 하다가, 말 안 듣는 아이들과 나이 들더니 눈물이 많아진 남편이야기, 그리고 친구들 얘기까지 두루두루 대화가 길어집니다. 같은 장면을 보고 같은 배우를 이야기하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삶을 꺼내 놓는 시간.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그 이야기들 덕분에 조금 더 웃으며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수다 한 컵에 거품을 낸 추억들을 듬뿍 얹어 점점 풍성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 한 편보다 더 재미있는 건 어쩌면 우리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오늘 영화 한 편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이야기를 한 편 더 찍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에게 가끔은 이렇게 영화를 보거나 또는 산책을 핑계로 수고로운 일상을 털어내는 쓸모 있는 쓸데없는 시간들을 권유합니다.

이거… 꽤 근사한 취미입니다.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니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관객수 1,300 만을 넘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우리나라에 진짜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