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마주친 그리움에게 부치는 편지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 하나쯤은 있겠지. 남들이 알까 봐 수줍어하며 마음 한구석에 고이 접어 장롱 깊이 넣어둔 오래된 상자 안의 먼지 쌓인 빛바랜 추억 말이야.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던 너의 고백에 나는 그저 웃기만 했었지. 그때는 몰랐어. 너로 인해 바보처럼 혼자 미소를 짓다가 소식이 조금만 늦어져도 안절부절못하는 날이 생기고 그러다 목소리 한번 들으면 모든 미움이 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날들이 내게 올 줄은.
혜화동의 어느 좁은 골목, 작은 카페 창가에 앉아 무슨 말을 해도 즐거웠던 시간들. 대학로 거리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흐르고 있었고, 거리 공연을 구경하던 인파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눈장난을 치곤 했었지. 그때 길을 건너며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거야.
어느 봄날이었던가, 우리는 해 질 녘의 낙산 성곽길을 함께 올랐었지. 어둠에 조금씩 잠겨가던 혜화동의 야경을 내려다보던 그 시간이 문득 떠올라.
말없이 성곽길을 뒤따라온 은은한 달빛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괜한 객기를 부리고 싶었나 봐. 성벽 위로 올라가 보려다가 보기 좋게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고 말았지. 너는 손을 잡아줄 생각도 않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잖아. 무안함 때문에 아픈 줄도 몰랐던 엉덩이보다, 너의 그 무심한 웃음소리가 더 크게 기억에 남은 걸 보면 아마 많이 서운했었나 봐.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꾸밈없는 웃음소리마저 네가 나에게 보여준 친근함이었다는 걸 오래 지나서야 깨닫게 되더라.
그때의 나는 시간이 영원히 우리 편인 줄로만 알았어. 그래서였을까. 그 반짝이던 순간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그렇게 빨리 빠져나갈 줄은 미처 알지 못했네. 시간은 무심히 흘러 계절은 수없이 옷을 갈아입었지만, 어떤 기억들은 결코 잊히지 않더라. 그저 조금 더 옅고 부드러운 파스텔색채로 내 마음속에 사뿐히 내려앉아 있을 뿐이지.
어느 날은 길을 걷다가 문득 그 시절의 공기가 얼굴을 스치는 순간이 있어. 그러면 나는 그 기억의 줄을 따라 길을 나서곤 해.
지하철 계단을 올라 거리로 나오면, 낮은 건물 사이로 저녁 햇살이 따스하게 흘러내리고 마로니에 공원 벤치에는 그때처럼 지금도 다정한 연인들의 이야기꽃이 피어나지.
그 생기 넘치는 풍경 사이를 천천히 거닐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골목 끝을 바라보곤 해.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이 거리 어딘가에서 우연히라도 너의 온기를 스치길 바라나 봐.
나,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어.
그때의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어디서든, 누구 와든 행복하게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