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넘버원」

엄마 밥을 거부해야 하는 아들 – 시간을 먹는다는 것의 역설

by 민초매니아

부산의 바다는 유난히 잔잔하다. 물결은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늘 무언가 가라앉아 있다. 「넘버원」은 그 가라앉은 시간에서 시작한다. 태어나는 날, 하민은 아버지를 잃는다. 위암 수술대 위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빈자리는, 그가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결핍으로 남는다. 시간이 흐른 뒤, 가족의 또 다른 기둥이던 형은 수능 시험을 보러 가는 길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설명할 수 없는 상실이 연달아 덮쳐온 자리에서 남겨진 사람은 어머니 은실과 아들 하민 둘뿐이다. 이 영화는 비극을 요란하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부산의 골목과 오래된 집,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밥 한 공기를 비춘다. 말수가 적은 집에서 감정은 대개 식탁을 통해 전달됐다.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 넘치는 고명의 잔치국수, 찬바람 불어 으실으실해질때 얼큰한 소고기국의 깊은 맛. 그것은 위로이자 약속이었고, 가족이 아직 남아 있다는 증표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익숙한 식탁 위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을 한 숟갈 뜨는 순간, 허공에 숫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숫자는 한 번의 식사마다 조금씩 줄어든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카운트다운은 그렇게 하민의 일상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판타지로 진입하지만, 그 방식은 과장되지 않는다. 공포영화처럼 긴장감을 밀어붙이지도, 멜로드라마처럼 감정을 폭발시키지도 않는다. 숫자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하민은 그것을 혼자 견딘다.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가 그 숫자의 의미를 알려주기 전까지, 그것은 막연한 불안일 뿐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식탁은 더 이상 위로의 공간이 아니다. 숫자가 0이 되면 어머니가 죽는다. 밥을 먹는 행위가 곧 어머니의 시간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면,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사랑하기에 거부해야 하는 선택


숫자의 의미를 알게 된 이후, 하민의 식사는 더 이상 일상이 아니다. 어머니가 끓여낸 국 한 숟갈, 반찬 하나를 집는 행위가 곧 시간을 소모하는 일로 바뀐다. 밥상은 위로의 장소에서 계산의 장소로 변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서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민은 곧장 오열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거리를 둔다. 어머니의 밥을 피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집밥을 거부하고, 엄마가 싸준 도식락을 몰래 버리고,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고, 결국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도망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비겁함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한 가장 소극적인 희생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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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부산과 다른 색을 띤다. 부산의 집이 따뜻한 조명과 생활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면, 서울의 공간은 차갑고 기능적이다. 도시락을 사서 먹거나,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해결하는 장면들은 특별한 설명 없이도 하민의 결심을 보여준다. 그는 굶지 않는다. 다만 어머니의 손을 거친 음식을 피한다. 관계를 끊는 대신 접촉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어머니는 이유를 모른 채 서운함을 표현하고, 하민은 진실을 말하지 않은 채 무심함을 가장한다. 이때 발생하는 긴장은 사건보다 관계에서 비롯된다. 말해버리면 끝날 일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침묵을 택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숨기는 선택이 과연 옳은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구조는 단순한 가족 갈등을 넘어선다. 숫자는 죽음의 예고이지만 동시에 책임의 표식이기도 하다. 하민은 어머니의 시간을 ‘관리’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밥을 먹지 않는 것이 효도라면, 효도의 방식은 왜 이렇게 왜곡되는가. 영화는 윤리적 판단을 유보하고, 사랑은 언제나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로는 차갑고 계산적인 선택으로도 나타난다는 이야기 한다 .


돌아가는 선택 – 남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기로 하다


서울에서의 시간은 버티는 시간에 가깝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선택한 거리 두기는 하민 자신을 점점 고립시킨다. 관계는 느슨해지며, 마음속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하민은 위암 3기 판정을 받는다. 영화는 이 장면을 비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진단은 충격이지만, 서사의 방향을 틀어놓는 장치로 기능한다. 그 순간 하민은 처음으로 자신의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어머니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이다. 여기서 영화는 중요한 선택을 보여준다. 하민은 수술을 미루고, 남은 시간을 계산하기보다 사용하기로 한다. 그는 부산으로 내려간다. 다시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 그 식탁으로 돌아온다. 이 선택은 체념이라기보다 전환에 가깝다. 그동안 그는 숫자를 줄이지 않기 위해 애써왔지만, 이제는 숫자가 줄어드는 과정을 함께 감당하기로 한다.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다시 먹기 시작하고,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밥을 거부하던 아들이, 밥을 받아들이는 아들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변화는 극적인 선언 없이 진행된다. 영화는 회개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반복을 보여준다. 엄마는 아들을 위해 밥을 하고 아들은 엄마와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숫자는 여전히 줄어들지만, 그 의미는 이전과 다르게 다가온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함께 보낼 수 있는 알려주는 모래시계처럼 작동한다. 하민의 위암 판정은 비극의 확장이 아니라, 관계의 복원으로 향하는 계기다. 그는 처음으로 숫자를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삶을 정리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와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 살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위암 수술을 받기로 한다. 예상했듯이 수술은 기적적으로 성공했고, 하민은 숫자 1앞에서 다른 시도를 하기로 한다. 어머니와 식사를 하지만 이제는 직접 해주기로 한다. 가족의 소울푸드였던 소고기국을 어머니로 부터 배워 하민이 직접 끓인다. 이 음식은 단순한 메뉴가 아니다. 아버지와 형이 함께 있던 시절의 기억이 담긴 음식이다. 그 국을 아들이 끓여 어머니에게 내민다. 그때 숫자는 1에서 0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1에서 2로 바뀐다. 영화는 이 변화를 설명하지 않는다. 특별한 효과음도, 장황한 대사도 없다. 다만 숫자가 하나 늘어난 화면이 제시될 뿐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철학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동안 숫자는 ‘소비되는 시간’의 지표였다. 밥을 먹을수록 줄어드는 수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숫자는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나눠질 때 늘어날 수도 있다는 암시다. 먹는 행위가 일방적 소비가 아니라 교환이 되는 순간, 숫자의 규칙은 바뀐다. 어머니의 밥을 받기만 하던 아들이, 어머니에게 밥을 건네는 존재가 되었을 때, 식탁은 단순한 생존의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순환 구조로 전환된다. 이 변화는 기적의 서사라기보다 관점의 이동에 가깝다. 영화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위암 판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숫자의 존재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숫자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시간을 혼자 붙들고 있던 상태에서, 시간을 함께 쓰는 상태로 이동했을 뿐이다. 이 미묘한 전환이 영화 전체를 지탱한다.


감정을 줄이는 연기 – 최우식의 절제와 장혜진의 생활성


「넘버원」이 과도한 신파로 기울지 않는 데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민을 연기한 최우식은 이 영화에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눌러 담는 방식을 택한다. 숫자가 줄어드는 순간에도 그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눈동자가 잠시 멈추고, 젓가락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릴 뿐이다. 이 절제는 계산된 연기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불안을 감추는 사람의 태도에 가깝다.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은 그의 상태를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최우식의 연기는 하민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평범한 아들이다. 서울로 떠나는 선택도,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결정도 과장되지 않는다. 위암 판정을 받는 장면에서도 그는 무너지기보다 멈춘다. 이 멈춤이 인물의 중심을 만든다. 숫자를 통제하려 했던 초반과 달리, 후반부의 하민은 통제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사람처럼 보인다. 최우식은 이 미세한 변화를 몸의 방향과 시선 처리로 표현한다.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 연기가 이 영화의 톤과 맞물린다.

장혜진이 연기한 은실 역시 전형적인 ‘희생적 어머니’의 과장된 이미지와는 거리를 둔다. 그는 큰 목소리로 울부짖지 않는다. 대신 밥을 차리면서 투덜거리고, 반찬을 권하면서 잔소리를 덧붙인다. 그 일상의 리듬이 인물을 현실에 붙들어 둔다. 아들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해 서운함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도 감정은 과장되지 않는다. 생활의 언어로 풀어낸다. 그래서 관객은 그를 상징적 존재로 보기보다 실제로 존재할 법한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두 배우가 함께 있는 장면은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긴장을 만든다. 부산 골목길을 걷는 장면이나, 말없이 식탁에 앉아 있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오래 머문다. 대사가 많지 않지만, 침묵이 비어 있지 않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으면서도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이 호흡이 영화의 정서를 지탱한다.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 대신, 관객이 스스로 채워 넣도록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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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원」은 구조만 놓고 보면 충분히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재료를 갖고 있다. 태어나는 날 아버지를 잃은 아들, 수능을 보러 가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 홀로 남은 어머니, 그리고 위암 3기 판정. 여기에 죽음을 예고하는 숫자라는 판타지 장치까지 더해진다. 이 요소들은 자칫하면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장면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영화는 예상보다 낮은 톤을 유지한다. 울음을 강요하지 않고, 음악으로 감정을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이 절제가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진다. 눈물을 흘리게 하기보다, 감정을 오래 머물게 한다는 점에서다.특히 후 반부는 비극의 확장이 아니라 관계의 재정렬로 수렴한다. 하민이 수술을 선택하는 과정 역시 기적의 드라마처럼 처리되지 않는다. 위암 판정은 충격이지만, 그것이 모든 갈등을 한 번에 해결하는 장치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죽음을 피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시간을 나누는 이야기다. 숫자 1에서 2로 바뀌는 장면 역시 과도한 설명 없이 제시된다. 이 여백이 영화의 미덕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비판의 지점도 분명하다. 은실이라는 인물은 끝내 아들의 서사 안에서 기능한다는 인상을 남긴다. 어머니의 삶은 식탁과 아들 중심으로 구성되고, 그의 내면은 깊게 확장되지 않는다. 희생적 모성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판타지 설정이 결국 관계 회복을 위한 안전한 장치로 작동한다는 평가도 있다. 숫자의 규칙은 마지막에 전환되지만, 그 변화의 원리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다. 관객에 따라서는 이 지점이 다소 편의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 논쟁은 결국 질문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는 감정을 소비하는가, 아니면 감정을 정리하는가. 설 연휴 극장가에 등장한 가족영화로서「넘버원」은 비교적 안전한 선택처럼 보인다. 동시에 자극적인 서사 대신 일상의 리듬을 택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태도는 장점이자 한계로 동시에 작용한다. 관객의 해석에 따라, 절제로 보일 수도 있고 미온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공간과 식탁 – 숫자가 놓이는 자리


「넘버원」에서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부산과 서울은 인물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는 구조적 장치로 기능한다. 부산의 집은 좁고 오래되었지만, 빛이 머문다. 부엌은 늘 무언가가 끓고 있고, 식탁 위에는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공간은 따뜻함을 상징하기보다 ‘지속성’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형이 떠난 뒤에도 일상은 이어졌고, 은실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밥을 지어왔다. 카메라는 이 반복을 크게 강조하지 않지만, 공간의 질감이 그것을 전달한다. 반면 서울은 기능적인 공간이다. 하민의 자취방과 회사, 편의점과 식당은 감정이 머물기 어려운 장소로 그려진다. 프레임은 상대적으로 정적이고, 색감은 차갑다. 서울에서의 식사는 빠르게 소비된다. 봉지째 들고 먹거나, 혼자 앉아 화면을 보며 대충 해결한다. 여기에는 냄비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도, 국을 덜어주는 손도 없다. 영화는 이 대비를 노골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관객은 자연스럽게 두 공간의 온도를 체감한다. 부산은 관계의 장소이고, 서울은 기능의 장소다.


식탁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다. 숫자는 언제나 식탁 위에서 나타난다. 허공에 떠오르지만, 그 배경은 늘 음식과 접시, 수저다. 숫자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그것이 놓이는 자리는 구체적이다. 이 대비가 영화의 핵심을 형성한다. 죽음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가장 일상적인 공간과 결합할 때, 관객은 그것을 먼 이야기로 밀어내기 어렵다. 숫자는 판타지적 장치이지만, 그것이 떠오르는 자리는 현실 그 자체다. 특히 소고기국 장면에서 카메라는 국물의 색과 김이 오르는 표면을 오래 비춘다. 그 위에 겹쳐지는 숫자는 더 이상 공포의 기호처럼 보이지 않는다. 음식과 함께 놓였을 때, 숫자는 삶의 일부처럼 보인다. 이 미장센은 영화의 메시지를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제시한다. 시간은 추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누군가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소비되거나 나눠진다. 숫자가 놓이는 자리, 그 식탁이야말로 이 영화의 중심 무대다.


「넘버원」은 겉으로 보면 죽음을 다루는 영화처럼 보인다. 숫자는 줄어들고, 위암 판정은 내려지며, 식탁 위에는 카운트다운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사용 방식이다. 초반의 하민은 시간을 ‘관리’하려 한다. 어머니의 수명을 줄이지 않기 위해 밥을 거부하고, 거리를 두고, 관계를 최소화한다. 시간은 계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는 시간을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줄어드는 것을 막으려는 대신, 줄어드는 동안 함께 있기를 택한다. 이 전환은 거창한 선언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식탁의 방향이 바뀐다. 받아먹는 자리에서 차려내는 자리로, 소비하는 시간에서 나누는 시간으로. 숫자가 1에서 2로 바뀌는 순간은 기적의 증거라기보다 관점의 이동을 상징한다. 시간은 혼자 붙들 때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눌 때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영화는 숫자의 원리를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 여백은 이 영화의 태도를 보여준다. 삶의 계산은 끝내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다는 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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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극장가에 도착한 이 작품은 자극적인 장르 영화들 사이에서 비교적 조용한 선택지로 보인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무력함이 아니다. 감정을 밀어붙이기보다 눌러 담고, 판타지를 설명하기보다 남겨두는 방식은 의도적인 절제에 가깝다. 동시에 모성 서사의 반복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도 사실이다. 은실의 삶은 끝까지 아들의 이야기 안에서 조명된다. 이 점은 관객의 해석에 따라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버원」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와 시간을 소비한다. 그러나 그 시간이 계산의 대상이 되는 순간, 관계는 쉽게 왜곡된다. 영화는 숫자를 통해 시간을 가시화하지만, 결국 묻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신은 오늘의 식탁에서 시간을 혼자 쓰고 있는가, 아니면 함께 나누고 있는가. 숫자는 보이지 않지만, 시간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넘버원」은 죽음을 예고하는 숫자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일상의 식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기적을 과시하지 않고, 눈물을 강요하지 않으며, 대신 시간을 함께 쓰는 행위의 의미를 묻는다. 완벽하게 새로운 서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절제된 연기와 공간의 대비, 그리고 숫자 1에서 2로 전환되는 상징적 장면은 이 영화가 단순한 가족 멜로드라마에 머물지 않도록 만든다. 이 작품은 죽음의 영화라기보다 관계의 영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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