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없다. 같은 기간 동안 배운 친구와 비교하면 아마 우리 아이가 진도는 제일 느릴 지도 모른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벌써 3년째인데 이렇게 영재성이나 성실성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전공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도 너무 잘 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에, 연습은 하루에 딱 2번씩 5분~15분 정도만 한다.
매우 열정적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가늘지만 길게 유지를 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어차피 어른되면 다 까먹는데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전공할 거 아니면 이제 3학년이니 예체능은 좀 줄이고 그 시간에 수학학원을 보내~"
매주 차로 왕복 40분이 걸리는 거리를 데리고 왔다 갔다 하고, 수업시간 동안 주변을 서성이며 대기하는 나를 보며 동친 언니들은 우려 섞인 말을 건넨다.
나도 안다. 왕년에 피아노 좀 쳤다는 나도, 8년을 배웠지만 지금 겨우 악보만 보고 뚱땅거릴 수 있는 수준이라 악기를 계속 다루지 않으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실력이 잊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레슨을 받는 건 놀랍게도
아이가 원해서다.
뛰어난 실력이나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닌데 아이는 바이올린을 너무 사랑한다. 아니, 바이올린 수업에 가는 것을 너무나 행복해한다.
예민함의 극치를 달리고 끈기가 없었던 우리 아이가 한 가지 악기를 1년 이상 배울 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엄마가 해보자고 하니 마지못해 바이올린 학원을 쭈뼛거리며 따라갔던 꼬마였는데,
그사이 연주회를 두 번이나 치르며 커다란 무대에 혼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과 합주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첫 상담 때만 하더라도 1~2년 배우고 악보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내 1순위였다. 내가 육아휴직을 할 동안 라이딩은 가능하니 그 정도 배우고 복직에 맞춰 다른 학원으로 대체하면 되겠다는 나름 계산적인 계획이 있었다.
어차피 우리 집 지운이는 포기가 빠른 편이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기에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을 했는데,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 끝나가도록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다. 다들 스즈키 3권에 들어가면 어려워서 질릴 것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모레스크를 연주하며 많이 즐거워하고 있다.
가늘지만 길게 바이올린을 즐기고 있는 비법이라면 바로,
심혈을 기울여 좋은 선생님을 찾은 것과 연습량에 대해 가타부타 1도 말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였다.
사실 처음에는 1학년 필수코스인, 남들이 모두 다닌다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보자고 했다. 하지만 무조건 가지 않겠다는 아이.
음악을 조금은 알아야 할 텐데 집에서 오선지, 음표까지 가르치기엔 나의 능력이 미천하니 사교육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피아노는 정말 배우고 싶지 않다고 하니 별 수 있나. 바이올린으로 눈을 돌려보았다. 다행히 바이올린은 유치원에서 낑낑깽깽 체험수업을 몇 주 동안 했기에 마음의 장벽이 낮았는지 어쩐 일로 거부는 하지 않았다(물론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
학군지 바로 옆에 찰싹 붙어있지만 진정한 학군지는 아닌 우리 집에서 도보로 다닐 수 있는 바이올린 전문학원은 슬프게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옆동네에 있는 바이올린 학원을 샅샅이 찾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약간 먼 곳까지, 주차가 가능한 곳인지, 선생님은 아이들과 잘 소통할 수 있으신지, 실력이 아닌 흥미를 끌어줄 수 있는 분인지를 기준으로 10여 개를 추렸고 일일이 전화를 돌려 상담을 받았다.
보통 아이라면 엄마가 시키는 곳에 순순히 따라가 다니겠지만,
일단 '싫어'가 기본 옵션으로 장착된 우리 집 아이에게는 좋은 선생님이 정말 필요했다. 바이올린 학원이 너무 낡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라면 더욱 좋겠고.
그러던 중,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바이올린 선생님의 SNS를 보게 되었고 편안한 스튜디오 사진을 보고 홀린 듯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다.
"선생님. 아이가 잘하지 않아도 돼요. 음악이 즐겁다는 걸 지운이가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럼요 어머니~ 그런 마음이시라면 저와 즐겁게 음악을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우리 이쁜 원장님. 느낌이 좋았다.
바이올린 스튜디오가 예뻤고, 아름다운 선생님은 친절하기까지 하니 아이가 싫어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예민하고 생각 많은 아이가 어쩐 일로 바이올린 수업, 연습시간 70분은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임한다고 했다.
수업이 일주일에 한 번이다 보니 레슨이 없는 날에 연습도 꾸준히 해야했는데, 이건 내가 조금 내려놓았다.
어렸을 때 피아노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다가 질려버린 경험 때문에, 하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바이올린 꺼내서 손에 들어보는 것에 의의를 뒀다. 어떤 날은 30초 만에 연습이 끝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악기를 꺼내 손에 쥐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다.
(3년 차인 지금도 여전히하루에 딱 한번, 기분 좋으면 두 번 연습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즐겁게 열심히 수업을 받고 연습도 하는데, 문제는 나였다.
처음에는 아이가 잘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꾀가 났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곳이라 여름에는 차 안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아이가 들어가면 난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 휴대폰만 바라보자니,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내 목이 더 구부러 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아이가 학원에 적응하듯 나 또한 비는 시간에 적응을 해, 이제는 그 70분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일주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퇴근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학원에 바래다 주고 나면 혼이 쏘옥 빠지는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에너지를 채울 소중한 시간이다.
차에서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안다. 나만 있는 이 조용한 공간에서 얼마나 빠른 시간에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는지. 나만 있는 이 차 안, 이 공간에서는 내가 정년이가 되고 옥경이도 될 수 있다.
밖은 어둡지만 휴대폰 액정에서 나오는 빛으로 이렇게 글을 쓸 때는 일필휘지, 내가 정말 작가라도 된 마냥 글이 줄줄 써진다.
가끔 피곤할 때는 또 이토록 안락한 1인용 침대가 따로 없고, 비가 올 때 차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인생사 뭐 있나 이게 행복이지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아이가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신나게 배울 동안, 나 역시 신나게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전히 아이는 악보를 보는 것에 서툴고 처음연주하는 음악은 어려워하지만 클래식 작곡가들의 이름을 불편하지 않게 많이 접하고 있다. 그뿐인가. 영어책을 읽다가, 수학문제를 풀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바이올린을 꺼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며 한숨 쉬고 간다.
공부가 너무 힘들고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악기 연주를 하고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는 사람, 음악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인생이 내가 꿈꿔온 것이었는데, 아이가 그렇게 커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내가 라이딩했던 시간, 차에서 기다렸던 시간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