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영상산업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지난 5일(현지시간)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WBD)의 스튜디오·스트리밍 부문을 720억 달러(약 106조 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부채를 포함한 기업가치는 827억 달러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기업 간 인수합병(M&A)이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 자본이 할리우드의 창작 유산을 완전히 포섭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며, 지난 한 세기 동안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지탱해 온 스튜디오 시스템의 공식적인 해체 선언에 다름 아니다.
넷플릭스는 지난 10여 년간 기존 미디어 질서의 교란자(Disruptor)였다. 케이블 TV의 코드 커팅을 유도하고, 극장의 홀드백 시스템을 무력화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워너의 영화·TV 스튜디오와 HBO라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서 깊은 브랜드를 흡수함으로써 넷플릭스는 이제 도전자의 지위를 벗어던졌다.
이 결합의 본질은 유통망과 제작소의 물리적 결합을 넘어선다. 넷플릭스는 그동안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확보해 왔으나, 102년간 축적된 워너의 아카이브와 문화적 정통성까지 복제할 수는 없었다. 이번 인수로 넷플릭스는 전 세계 3억 명 이상의 구독자 데이터라는 최첨단 무기에, 해리 포터·DC 코믹스·왕좌의 게임이라는 불멸의 지적재산권(IP)을 장착하게 됐다. 디지털 플랫폼이 전통 미디어의 심장을 이식받아 완벽한 수직계열화를 이룬 '콘텐츠 권력'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시장은 이번 인수를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 관점에서 해석하며 수십억 달러의 비용 절감 효과를 거론한다. 넷플릭스 역시 인수 후 3년 차부터 연간 20억~30억 달러의 비용 절감을 전망했다. 그러나 넷플릭스의 셈법은 더 복잡한 층위에 있다.
스트리밍 시장의 성장이 둔화된 시점에서 승부처는 단순한 가입자 순증(Net adds)이 아니다. 핵심은 검증된 IP를 통해 이용자를 생태계 내에 영원히 묶어두는 락인(Lock-in) 전략이다. 워너가 보유한 IP들은 영화·게임·테마파크·머천다이징으로 무한 확장이 가능한 '슈퍼 IP'다. 넷플릭스가 꿈꾸는 것은 단순한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가 아니다. 디즈니가 지난 수십 년간 보여준 'IP의 라이프사이클 관리'를 자신들의 데이터 분석 역량과 결합하려는 것이다. OTT는 이제 단순한 관람의 장소가 아니라, 거대한 팬덤 경제가 작동하는 운영체제(OS)가 되려 한다.
이 거대한 공룡의 탄생 앞에서 각국 규제 당국, 특히 미 법무부(DOJ)와 연방거래위원회(FTC)는 난해한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전통적인 반독점법의 잣대인 '소비자 가격 인상 우려'나 '시장 점유율'만으로는 이 결합의 위험성을 온전히 재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23년 미 법무부가 발표한 최신 반독점 지침에 따르면, 시장 점유율 30%가 합병 차단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선인데, 합병 후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시장 점유율은 이를 상회할 전망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문화적 독점'과 '바잉 파워(Buying Power)의 남용'이다. 전 세계 영상 유통의 과반을 차지하는 플랫폼이 제작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을 때,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는 제작사들의 협상력은 급격히 위축된다. 이는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과 창작의 자율성이 거대 자본의 알고리즘에 종속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문제다. 미국 작가조합(WGA)이 "일자리가 사라지고, 임금이 하락하며, 소비자 가격은 인상되고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창작자들에게 이번 빅딜은 기회이자 디스토피아다. 넷플릭스는 워너와 HBO의 브랜드를 유지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업계는 넷플릭스 특유의 효율성 중심 문화가 HBO의 장인 정신을 잠식할 것을 우려한다.
HBO는 실패를 감수하더라도 작가의 비전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소프라노스, 왕좌의 게임 같은 명작을 만들어왔다. 반면 넷플릭스는 시청 지속 시간과 가입 기여도를 분 단위로 쪼개어 콘텐츠의 생사를 결정한다. 이 두 문화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데이터는 흥행 공식을 알려줄 수 있으나,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는 의외성을 제거할 위험도 크다. 모든 콘텐츠 제작 결정이 "이 데이터에 따르면 수익성이 높다"는 논리로 귀결될 때, 실험적이고 전복적인 서사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봉준호 감독은 지난 6일 마라케시 국제영화제에서 "스트리밍도 영화를 보고 즐기는 훌륭한 방식"이라면서도 "극장 관람 경험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옥자로 넷플릭스와, 미키 17로 워너브라더스와 협업한 그의 발언은 창작자들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한다.
이번 합병이 한국 콘텐츠 시장에 던지는 함의는 더욱 무겁다.
첫째, 국내 OTT 시장의 위기가 심화될 전망이다. 현재 한국에서 넷플릭스는 약 34%의 점유율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티빙(21%), 쿠팡플레이(20%), 웨이브(12%)가 그 뒤를 잇는다(2024년 이용자 수 기준, 모바일인덱스). 넷플릭스가 HBO 맥스의 프리미엄 콘텐츠까지 독점하면 토종 OTT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이 추진되는 것도 이러한 글로벌 공룡에 맞서기 위한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둘째, K-콘텐츠 제작 생태계의 구조적 취약성이 노출될 수 있다. 오징어 게임 이후 한국은 넷플릭스의 핵심 생산 기지였다. 그러나 넷플릭스와 워너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국 제작사들이 마주해야 할 바이어(Buyer)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대해진 넷플릭스는 한국 시장에서 더욱 막강한 협상력을 행사할 것이다. 로컬 제작사들은 더 큰 예산과 글로벌 배급망을 얻는 대가로 IP 소유권을 포기하고 제작 마진만을 챙기는 하청 구조가 고착화될 위험이 있다.
셋째, 극장 산업의 위기가 가속화될 수 있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한국의 연간 극장 관객 수는 역대 최고인 2억 2,668만 명에 달했으나, 스트리밍 서비스 확산으로 회복이 더딘 상황이다. 워너브라더스는 원래 극장 개봉을 중시하는 회사였으나, 넷플릭스 산하로 들어가면 스트리밍 우선 정책이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6만여 극장을 대표하는 시네마유나이티드(Cinema United)가 "이 거래는 극장 산업에 전례 없는 위협"이라고 경고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번 딜을 해외 기업 간의 결합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국내 미디어 생태계가 글로벌 플랫폼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조적 대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IP 확보 지원, 플랫폼 경쟁력 강화, 그리고 제작사들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K-드라마와 K-예능의 글로벌 인기가 지속되고 있으나, 그 수익과 권리가 누구에게 귀속되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넷플릭스의 워너 인수는 스트리밍 전쟁의 종착역이 아니다. 이것은 미디어 산업이 플랫폼 자본주의의 완성형으로 진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넷플릭스는 이제 단순한 영상 서비스 회사가 아니다. 전 세계인의 여가 시간을 점유하고,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에 열광할지를 설계하는 문화 인프라 기업이 되었다.
물론 이 거래가 최종 성사되려면 미국과 유럽 규제 당국의 반독점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 거래에 회의적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넷플릭스가 거래 무산 시 58억 달러(약 8조 5천억 원)의 위약금을 부담하기로 한 것은 그만큼 규제 리스크가 크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이 거래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의 스크린을 채울 이야기들은 누구의 의도로, 어떤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되는가. 소비자의 '볼 권리'를 넘어, 시민으로서 서사를 지배하는 권력 구조를 감시하는 눈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