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동치는 세상의 증셈에서 길을 묻다 -
역사는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때로는 굽이치고 때로는 역류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2025년 한 해,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지나온 항로가 바로 그러했다. 전국 대학교수 766명이 머리를 맞대고 선정해 낸 올해의 사자성어, ‘변동불거(變動不居)’는 지난 1년간 우리가 목도한 현기증 나는 시대의 풍경을 단 네 글자로 압축해 낸 명징한 진단서다.
전체 응답자의 33.94%가 선택한 이 말은 『주역(周易)』 「계사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세상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며 변한다”는 뜻이다. 고전의 지혜를 빌려 오늘의 현실을 비춰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변화의 통증’을 앓고 있다. 계엄 선포와 대통령 탄핵, 조기 대선과 정권 교체라는 헌정사의 거대한 파도가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거리와 광장, 그리고 온라인의 타임라인은 매일같이 새로운 뉴스로 뒤덮였고, 어제의 권력이 오늘은 심판대에 오르는 극적인 반전이 일상처럼 반복되었다. 교수들이 이 사자성어를 통해 포착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혼란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라 믿었던 권위와 질서가 얼마나 허망하게 유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집단적 각성이었다.
주목할 점은 변동불거 뒤를 이은 차점자들이다. 하늘의 뜻마저 알 수 없다는 ‘천명미상(天命靡常)’과 방향 잃은 군중의 불안을 빗댄 ‘추지약무(雛之若毋)’가 나란히 상위권에 올랐다. 이는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는 한국 사회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휩쓸려 다니는 불안감,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공포가 이 사자성어들의 행간에 짙게 배어 있다.
그러나 변동불거를 단순히 혼란과 불안의 동의어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진실만을 보는 셈이다. 주역이 말하는 변화란 무질서한 파괴가 아니라, 음과 양이 교차하며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우주적 율동이다. 양일모 서울대 교수의 지적처럼, 이 말은 “격변하는 현실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그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원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묵직한 주문을 담고 있다.
2025년의 대한민국은 정치적 격변 외에도 AI시대의 도래, 플랫폼 노동의 확산, 그리고 양극화 심화라는 문명사적 전환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K-컬처가 세계를 매혹시키고 정상외교의 성과가 국격을 높이는 동안, 한편에서는 ‘강약약강(强弱弱強)’의 비정한 논리가 사회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이러한 다층적인 모순과 양가성(ambivalence)이야말로 변동불거의 진짜 얼굴이다. 기술은 빛의 속도로 진보하는데 제도는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자본은 국경을 넘나드는데 노동의 삶은 파편화되는 이 불일치(mismatch)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머무르지 않는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흐르는 물을 막을 수 없다면 배를 띄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변동불거는 우리에게 수동적 방관자가 아닌, 능동적 행위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변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분석과 응전의 대상이다. 지난 한 해 우리가 겪은 정치적 시련이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듯, AI와 경제적 불평등이 던지는 난제 역시 새로운 사회 계약과 윤리를 세우기 위한 진통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변동불거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거센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켜야 할 민주주의의 가치, 인간의 존엄, 그리고 공동체의 신뢰는 어디에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을 품고 2026년이라는 새로운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요동치는 세상의 중심을 잡는 힘은 결국 깨어 있는 시민들의 연대와 성찰에서 나온다. 변화를 거부하는 낡은 닻을 올리고, 변화의 바람을 타고 더 나은 미래로 항해하는 지혜, 그것이 바로 변동불거가 2025년의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