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젠슨황, 치맥과 러브샷으로 ‘깐부선언’

1996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편지로 이어지 사연

by 마르코 루시

서울 삼성동의 한 치킨집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다. 개점 1시간 전부터 시작된 '오픈런'이었다. 그들이 기다린 건 치킨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앉았던 테이블이었다. 매장은 그 테이블을 1시간 제한으로 운영했고, 방문 인증샷이 SNS에 폭발했다. 그가 주문했던 메뉴를 찾는 손님들로 북적였고, 매출이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일부 매장은 재고 부족으로 일시 휴업까지 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젠슨 황. 시가총액 5조 달러, 한국 전체 증시의 2배 규모를 자랑하는 엔비디아의 CEO다. 그가 그곳에서 이재용, 정의선 회장과 함께 치맥회동을 하며 폭탄주와 러브샷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일각에서는 "치맥 쇼"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며칠 뒤 발표된 숫자 앞에서 냉소는 침묵이 되었다. 엔비디아는 한국에 GPU 26만 장, 14조 원 규모를 공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치킨집 성지순례는 14조 원짜리 거래의 서막이었다.


‘우리가 사주는 쪽인데 무슨 호들갑‘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AI 붐 때문에 지금 돈을 줘도 구하기 힘든 게 엔비디아 GPU다. 26만 장 중 5만 장은 정부의 국가 AI 컴퓨팅 센터로, 나머지는 삼성, 현대차, SK, 네이버로 간다. 한국은 단숨에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위 GPU 보유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 30년 전에 시작되었다. 1996년, 창업 3년차 스타트업 엔비디아에 한 통의 우편물이 도착했다. 이메일이 아닌 타자기로 작성된 편지. 발신인은 이건희 삼성 회장. 그는 세 가지 예언을 담았다. 대한민국 모든 가정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겠다. 비디오 게임이 한국 기술 성장의 씨앗이 될 것이다. 세계 최초로 비디오게임 올림픽을 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정보교환 수단으로 여기던 시절, 그는 GPU가 핵심 기술임을 꿰뚫어 보았다.


30년 후 코엑스 무대에서 이재용은 "제 아버지가 보낸 편지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글로벌 e스포츠 시장은 81억 달러를 넘어섰고 한국은 종주국이 되었다. 그의 예언은 숫자로 증명되었다. 그런데 젠슨 황은 왜 한국을 선택했는가? 감성 때문이 아니다. 구글, 아마존 등 빅테크들이 자체 AI 칩 개발에 나서는 상황에서 HBM 메모리 주요 생산국인 한국과 동맹을 맺는 것은 생존 전략이다. 삼성은 2025년 10월 마침내 20개월간의 품질 테스트를 통과해 엔비디아에 HBM3E 공급을 시작했다. 중국을 잃어가는 엔비디아에게 한국은 기술 파트너이자 대체 시장이다. 그리고 베팅하는 건 엔비디아만이 아니다. 블랙록은 한국을 아태 지역 'AI 수도'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이 대통령을 면담했다. 팔란티어 CEO는 "첫 여자친구가 한국인"이라며 서울을 찾았다.


왜 한국인가? 반도체 강국이며 AI 인프라를 위한 에너지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국 포털을 보유해 데이터가 풍부하다. 무엇보다 제조 강국이다. AI가 가상세계를 넘어 현실로 나오려면 AI에게 '몸'을 만들어주고 학습용 제조 데이터를 쌓을 산업 기반이 필수다. 온 나라의 역량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정부와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국민이 공존한다. 한국은 AI의 미래를 그리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고루 갖춘 거의 유일한 나라다. 중국이 대항마지만 미국의 견제를 받고 있다. 더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헬조선'이라 부르면서도 남이 우리를 낮춰보는 건 참지 못한다. 이 모순된 위기감이 한국의 역동성을 만들었다. 위기를 자양분 삼아 성장해 온 DNA. 스케일을 배제한 '유닛당 평균 전투력'을 비교하면 한국을 능가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이것이 젠슨 황이 치킨집을 성지로 만든 진짜 이유다.


1996년 이건희가 본 것은 GPU가 아니라 바로 이 DNA였다. 그가 예견한 초고속 인터넷, 게임, e스포츠는 모두 한국이 위기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DNA는 AI 시대의 전략 자산이 되었다. 삼성동 치킨집 앞에 줄 선 사람들은 단지 팬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쇼가 아니라 30년 비전의 완성이라는 것을. 이건희의 편지가 증명했듯 써 내려간 비전이 미래를 만든다. 우린 지금 어떤 비전의 편지를 타이핑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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