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계속 참고 있었을까

-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7화 -

by 마르코 루시

회의실에서 나온 뒤였다.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서 고개만 끄덕이고,

적당히 미소만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도 입을 열지 못했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참는 사람이 되었을까.

돌이켜보면 참는 일의 연속이었다.

지하철에서 누군가 어깨를 세게 부딪쳐도 괜찮다고 했다.

카페에서 주문한 음료가 틀려 와도 그냥 마셨다.

동료가 자신의 일을 떠넘겨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식당에서는 음식이 늦게 나와도 기다렸다.

맛이 없어도 다 먹었다.

서비스가 불친절해도 불편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계산대에서 실수가 있어도 조용히 넘어갔다.


친구와의 약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늦게 와도 화내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을 가자고 해도 따라갔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어도 맞장구쳤다.

직장에서는 더했다.

야근을 요청받으면 개인 일정을 취소했다.

부당한 업무 배분이 있어도 감수했다.

상사의 기분이 나쁜 날에는 더욱 조심스러워했다.


가족 모임에서도 참았다.

하기 싫은 이야기를 들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지 않는 조언을 받아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자동으로, 생각할 틈도 없이 참았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언제부터였을까.


어릴 때를 떠올려봤다.

초등학교 시절, 짝꿍이 공책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싫다고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그 공책은 새것이었고, 소중했는데도 건네줬다.

중학교 때는 더했다.

친구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했을 때

용돈이 부족했는데도 사줬다.

거절하면 왕따가 될까 봐 두려웠다.

돈이 없어서 점심을 굶은 날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조별 과제에서 늘 혼자 다 했다.

다른 아이들은 각자 이유를 대며 빠졌고,

그녀는 혼자 밤새워 완성했다.

억울했지만 선생님께 말하지 않았다.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 모임에서 궂은일은 늘 자신의 몫이었다.

회비를 걷고, 장소를 예약하고, 뒤처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즐기기만 했다.


첫 직장에서 신입사원일 때는 더욱 심했다.

선배들의 심부름을 거절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일까지 떠맡았다.

주말에도 호출이 있으면 나갔다.

그렇게 참다 보니 어느새 참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착한 사람, 순한 사람, 부탁하기 쉬운 사람.

그런 평가를 받을수록 더 참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졌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들이 떠올랐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 "착한 아이는 참는 거야",

"싫다고 하면 이기적인 거야".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왜 그랬을까.

참는 이유를 하나씩 떠올려봤다.


첫 번째는 미움받기 싫어서였다.

싫다고 말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까 봐 두려웠다.

관계가 틀어질까 봐 걱정됐다.

외로워질까 봐 무서웠다.


두 번째는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였다.

배려심 있는 사람,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칭찬받고 싶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다.


세 번째는 갈등이 무서워서였다.

의견이 다르다고 말하면 싸움이 일어날까 봐 겁났다.

논쟁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네 번째는 거절하는 방법을 몰라서였다.

어떻게 말해야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지 모르겠었다.

적당한 핑계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더 쉬웠다.


다섯 번째는 자신감이 없어서였다.

내 의견이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상대방이 더 옳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섯 번째는 습관이 되어서였다.

어릴 때부터 참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다.

자동 반응처럼 굳어져 있었다.


참는 것의 대가는 컸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냈다.

어깨가 늘 굳어 있었고, 목이 자주 아팠다.

소화가 잘 안 되었고, 잠들기 어려운 밤이 많았다.

두통도 잦았다. 마음도 무거워졌다.

억울함이 쌓여갔다. 분노가 속에서 끓었다.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다.

내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도 진짜가 아니었다.

상대방은 편했겠지만, 진정한 소통은 없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했다.

받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균형이 깨져 있었다.

결국 자신을 잃어버렸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모르게 됐다.

내 의견이 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다 보니 나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가장 무서운 건 참는 것이 당연해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잊어버렸다.

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선택권이 있다는 걸 몰랐다.

사람들은 참는 사람을 이용했다.

부탁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참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됐다.

거울 속 얼굴은 낯설었고,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들의 요구에 맞춰 살다 보니 나는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회사 복도 끝에 서서 창밖을 내다봤다.

오늘도 참았다.

내일도 참을 것이다.

모레도, 그다음 날도.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고 들어왔다.

참을 인 자를 세 번 쓰면 살인을 면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과연 옳은 것일까.

참는 것만이 정답일까.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참는 것이 아니라,

참지 않는 것이 진짜 용기일지도 모른다고.

미움받을 용기, 갈등을 감수할 용기,

내 의견을 말할 용기.

그런 용기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참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솔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착한 사람보다는,

진짜 나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창밖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참았지만,

언젠가는 참지 않을 날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올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조금 더 견뎌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참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다른 선택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는

그 선택을 과감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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