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할리우드 임원들은 코웃음 쳤다. "AI 배우? 말도 안 돼!" 그런데 7개월 후,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취리히 서밋(Zurich Summit)'에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9월 27일 패널 토론회에서 한 사람이 던진 폭탄 발언이 할리우드를 충격으로 뒤흔든 것이다. 네덜란드 출신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엘린 반 더 벨덴. 그녀가 세계 최초의 AI 배우 스튜디오 시코이아(Xicoia)를 통해 선보인 첫 AI 배우가 바로 틸리 노우드(Tilly Norwood)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 쳤던 그 에이전트들이 이제는 계약서를 들고 줄을 서고 있다. 숫자로 보면 더 놀랍다. 2024년 전 세계 AI 인플루언서 시장은 6.95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고, 2030년까지 378억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 모든 장면이 묘하게 낯익다. 2002년 알 파치노가 나온 영화 <시몬(S1m0ne)>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었기 때문이다. 과연 23년 전 영화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걸까?
영화 <시몬> 속 이야기는 이렇다. 몰락한 영화감독 빅터 타란스키가 까다로운 배우들에 질려서 컴퓨터로 완벽한 여배우 '시몬'을 만든다. 시몬은 대박이 난다. 전 세계가 열광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녀가 가짜인 줄 모른다. 지금 현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브라질의 루 도 마갈루(@magazineluiza)는 인스타그램에서 800만 팔로워를 보유한 세계 최고 AI 인플루언서다. 지난해만 74개 스폰서 포스트로 25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중국의 아야이(AYAYI)는 2021년 첫 게시물로 하룻밤에 300만 뷰를 기록했고, 30개 넘는 글로벌 브랜드와 계약을 맺었다. 스페인의 AI 모델 아이타나 로페스(@fit_aitana)는 매월 1만 유로를 벌어들인다.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영화 속 시몬은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150명 넘는 AI 인플루언서가 동시에 활동한다는 것이다. 틸리 노우드는 대본 없이 대화하고, 실시간으로 트렌드에 반응하며, 플랫폼마다 다른 톤으로 말한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앞서갔다.
2022년 윌 스미스의 오스카 사건으로 Netflix의 <Fast and Loose>, Sony의 <Bad Boys 4> 등 여러 프로젝트가 연기되거나 무산됐다. 2024년 <더 브루털리스트>에서 AI로 생성한 헝가리어 대사 논란이 아카데미상 시즌을 뒤흔들었다. 이제 그런 걱정은 없다. 틸리 노우드 같은 AI 스타들은 지치지 않는다. 늙지 않는다.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새벽 2시에도 팬사인회를 한다. 동시에 100개 나라에서 인터뷰를 한다. 완벽하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무섭다. 실제로 틸리 노우드 발표 직후 에밀리 블런트는 "정말, 정말 무섭다"라고 반응했고, 나타샤 리온은 "완전히 잘못됐다"며 분노를 표했다. 미국배우조합(SAG-AFTRA)은 성명을 통해 "틸리 노우드는 배우가 아니다. 허가나 보상 없이 수많은 전문 배우들의 작품으로 훈련된 컴퓨터 프로그램이 만든 캐릭터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스튜디오들은 벌써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2024년 AI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시장은 26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고, 2030년까지 994억 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현재 전 세계 44개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활동하는 미국이 선두를 달리고, 일본(11개), 영국(9개)이 뒤를 따른다. AI 인플루언서들의 평균 참여율은 2.84%로 인간 인플루언서(1.72%)를 앞선다. 돈의 흐름도 이를 뒷받침한다. 넷플릭스는 AI 콘텐츠 제작에 연간 5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2026년 초면 주요 스튜디오들이 AI 프로젝트를 본격 공개할 거라는 업계 전망도 나온다. 23년 전에는 영화 속 상상이었던 게 지금은 수백조 원짜리 현실이 됐다. 웃긴 건 할리우드가 자기들을 비꼰 영화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시몬> 감독 앤드류 니콜은 뭘 말하려던 걸까? 영화 마지막에 감독은 깨닫는다. 완벽한 가짜보다 불완전한 진짜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만들었을 때도 비슷했다. 필사본을 베끼던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했지만, 결국 더 많은 사람이 글을 쓰게 됐다. 사진이 나왔을 때 화가들이 사라질 거라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예술 장르가 탄생했다. AI 스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23년 전 영화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계가 천 명의 완벽한 스타를 만들 수 있다면, 인간은 뭘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AI가 완벽해질수록 인간의 불완전함이 더 귀해질지 모른다.
실수하고, 늙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만이 가진 진짜 감정과 스토리 말이다. 반 더 벨덴은 "틸리는 예술 작품"이라고 했지만, 그 예술이 인간 배우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순간 예술은 무기가 된다. 23년 전 영화가 물었던 걸 지금 우리가 다시 묻는다. 우리는 뭘 원하나? 완벽한 AI 스타의 매끄러운 연기? 아니면 불완전하지만 진짜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 그리고 진짜 질문은 이거다. 그 옛닐 영화가 이미 모든 걸 경고했지만, 작금의 흐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영화 <시몬>에서 영화 속 감독은 완벽한 시몬을 만들었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그림자에 갇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과연 AI 배우의 미래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대세일까? 아니면 한 때의 통과의례적 유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