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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규 Mar 02. 2021

단어의 문을 열면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들

어렵게 구한 전세방에 입주한 지 2주가 되어간다. 빈방을 내가 원하는 가구들로 채우고 나니 나만의 방이 생겼다는 게 실감 났다. 퇴근하고 방에 와서 깨끗하게 씻고, 불을 다 끄고 조명만 켠 다음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지금 시간이 정말 좋다. 하루 중 유일하게 내가 원하는 조건들이 다 갖춰진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 내가 원하지 않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입주한 지 삼사일 째 된 날부터 느끼게 된 화장실 천장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딱- 딱- 소리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비정기적으로 반복되는 딱- 딱- 소리에 몹시 예민해졌다. 내가 화장실에서 물을 쓰고 나서도 딱- 딱- 소리가 들렸지만, 내가 물을 쓰지 않을 때도 자주 들렸다. 이 소리 때문에 잠들기 힘들었고, 새벽에 자다가 깨곤 했다.


나는 집주인 아저씨께 소음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주인아저씨는 내 방 수압을 낮춰보는 등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셨다. 그러나 삼사일에 걸쳐 여러 조치를 취해봐도 소음이 사라지지 않자, 아저씨는 내가 예민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전에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세입자가 없었으므로, 정 이 소음을 못 참겠으면 다른 세입자를 구해서 나가라고 하셨다. “민규 씨가 못 참겠으면 나가야지 뭐… 어쩔 수 있겠어….?”라고 하셨다. 나가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라고 하셨다.


이는 매우 간단한 말처럼 들렸지만, 나가라는 말은 나에게 아득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나에게 이 문장은 이렇게 다가왔다.


(*2년 전세 계약 중 2주 지낸 상황)

1. 다른 세입자를 구하라 그리고

2. 이 방을 구하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을 다시 들여라.

(3주간 직방과 다방, 네이버부동산을 매일 들여다보고 점심시간에 부동산에 전화하고 퇴근 후에 방을 보러 다니고 주말에도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방을 알아봤던 시간과 노력과 스트레스를, 다른 방을 구하기 위해 다시 겪어라)


그래서 나는 참고 살아보겠다고 했다. 1, 2를 겪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음악을 틀어두거나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금씩 이 상황에 적응해나가고 있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 방에 놀러 갔다 왔다. 친구는 세종시에 사는데, 나에게 서울에서 1시간 30분 정도밖에 안 걸리니 한번 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고속버스 탑승 시간만 1시간 30분이었고, 내 방에서 나와 친구 방까지 가는 데는 2시간 정도가 걸렸다. 친구 방으로 갈 땐 이 거리감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 즐거운 만남을 앞둔 설렘이 피로감을 덮어버렸던 것 같다.


 진짜 피로감은 돌아올 때 느껴졌다. 그날은 봄처럼 따뜻해서 버스 안이 무척 더웠다. 등과 엉덩이에 땀이 난 채로 버스에 1시간 30분 앉아 있었고, 버스에서 내려 내 방으로 오는 지하철을 30분가량 탔다. 오후 2시 30분쯤 친구 방에서 나왔는데 방에 돌아오니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방전되어서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번 놀러 와”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머리에서 그려야 할 약도에 대해서. 내가 전주에 사는 친구에게 “서울 놀러 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안 오냐”고 했을 때 친구가 머뭇거렸던 이유에 대해서.


단어의 문을 열면 단어의 길이보다 긴 이야기가 나온다. 단어의 모습보다 복잡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단어의 문을 열었을 때 펼쳐지는 이야기는 사람마다 다르게 형성된다.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나가라고 했을 때 ‘나가다’는 각자에게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아저씨에게는 귀찮은 세입자를 내보내는 간단한 해결 방법으로, 나에게는 방 구하는 스트레스의 반복으로 다가왔다. 고향에서 지내는 친구에게 서울로 놀러 오라고 했을 때, ‘놀러 오다’(한 단어는 아니지만)는 서로에게 다른 피로도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른 단어의 문도 열어본다. 스물아홉인 내가 서른이란 단어의 문을 열어본다. 스무 살에 열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서른이 되면 번듯한 내 집도 있고 좋은 차도 있고 연봉도 넉넉할 거라 믿었다. 그렇게 미리 써 놓았던 이야기는 많이 수정되었다. 집도 차도 없고 연봉도 넉넉하지 않다. 내 나이대 다른 사람들은 잘만 사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인생 헛살았나 하는 현타가 자주 온다. 이렇게 나이만 드는 건 아닌지 막막함이 자주 밀려온다.


그래도 내가 서른에 가까워지면서 나아진 점이 있다면, 그건 오늘 했던 생각처럼, 어떤 단어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마음에 새기고 대화에 임한다는 것이다. 내가 무조건 짱이고 내 생각이 옳다는 세계관으로 20대 초반을 살았고, 중반과 후반을 지나오며 나의 세계관은 다른 세계관과 자주 충돌했고 많이 부서졌다.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세계관은 넓어졌다. 동시에 내가 모르는 세계관의 존재를 항상 의식하게 되었고 누구와 대화할 때 단어를 선택하면서 많이 조심하게 되었다. 이 마음가짐은 사람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지만 내가 배우고 성장하는 기회를 더 많이 획득하게도 해주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내 기준으로만 단어를 선택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때가 아직도 많다. 미안한 사람이 많아서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어떨 때는 내가 정말 나쁜 사람인 것 같아서 삶을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계속 노력해보려 한다. ‘같은 단어에 대한 다른 이야기’의 존재를 의식하는 한, 나의 대화 방식은 계속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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