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시간이 지날수록 유찬이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오늘은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다. 저녁 먹자고 말하려고 방문을 열려고 하니 잠겨있다.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지나간다. 이내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흩날리고 혼자 저녁을 간단히 먹는다.
내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유찬이 방에 조심히 귀를 대본다. 눈치 보는 거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저녁 10시쯤 방문이 열린다. 그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온다.
-일어났어? 밥 먹어야지?
-네.
-뭐 해줄까? 고기 구워줄까? 카레 남은 거 있는데 그거 줄까?
-그냥 라면 하나 끓여주세요.
-아까 점심 먹고 여태 안 먹었는데 밥 먹어.
-배 크게 안고파요. 귀찮기도 하고, 라면이면 돼요. 김치는 있죠?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어하는 게 기다리는 일인데, 앞으로 사는 게 인내심이 겁나 필요한가 보다. 이렇게 아들이 나를 훈련시키는 거 보면 말이다. 잔소리를 발사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삼킨다.
식탁에 라면과 김치, 젓가락, 숟가락을 놓고 유찬이를 부른다.
-유찬아, 다 됐어. 나와서 먹어.
-엄마 저 혼자 편하게 먹고 싶은데요.
-어? 알겠어. 그럼 다 먹고 싱크대에 담가놓고, 김치 냉장고에 넣어놔.
-네 그럴게요.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이야기하고 싶어서 앉으려는 나를 보며 유튜브 보면서 혼자 먹고 싶다며 칼차단을 한다. 나 원 참, 더러워서.
유튜브로 뭘 보면서 라면을 먹는 건지 웃음소리가 들린다. 뭐라도 보고 웃으니 다행이다 싶다.
새벽 1시 잘 준비를 하고 문단속하고 주방이며 거실 소등하고 내방으로 들어가며 유찬이 방을 보니 방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밤샐 각이다.
-엄마 잔다. 너무 늦게 자지 말고.
듣지도 않을 잔소리를 한발 발사하고 방에 들어간다.
#23
-유찬아, 엄마 취미가 뭔지 물어봐봐.
-갑자기요? 취미가 뭐예요?
-제 취미는 뜨개와 독서입니다.
-푸하하하
-뭐야, 왜 비웃지?
-비웃는 거 아니에요. 취미가 너무 고상하네요.
요즘 빠져있는 것 중에 하나가 뜨개질이다.
한참 뜨개 수세미가 유행할 때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수세미 실을 검색해 보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검증도 안 되는 상태에서 대량으로 구매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우연히 전 직장 동료 선생님과 재래시장에 갔다가 뜨개방을 본 것이다.
수세미 실 하나 1,000원, 3호 코바늘 하나 2,000원. 그렇게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와 시작한 뜨개는 몇 년 동안 나의 주말 시간을 채워주었다.
유튜브로 코바늘의 기본기 영상을 보다 보니 초등학교 고학년 때 배웠던 기본 뜨기가 생각이 난다. 유튜브를 보며 하나하나 완성해 갔다. 처음엔 수세미만 주야장천 만들었다. 그리고 약속이 있을 때면 챙겨나가서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수세미가 익숙해질 때쯤 티코스터, 키링, 가방, 목도리, 모자등 다양한 소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한번 시작하면 완성될 때까지 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뜨개를 하기도 했다. 소품들을 만들고 나면 모아서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하루면 완성되는 소품에서 완성기간이 길고,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대바늘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만 나면 뜨개를 하고 싶어 하는 나를 보며, 이런 걸 취미라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북 청산에 사는 대학 친구 현주는 결혼하고 청산으로 내려가 살게 된 친구다. 이혼하고 7년 정도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내 꼬락서니를 보여주기 싫었다. 그렇게 꽁꽁 숨어 지내다가 인스타를 시작하면서 친구들과 연락이 닿게 된 것이다.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되기 시작하고 나서, 현주랑은 가장 멀리 살지만 가장 자주 연락하고 만났다. 보통은 현주가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오거나 나를 만나기 위해서 올라와 주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석희야, 나 뜨개 해보고 싶어.
-좋지. 근처에 뜨개방 같은 게 있나?
-네가 알려주면 안 돼?
-안될 건 없지. 그래도 근처에 할만한 데가 있으면 그게 더 나을 거 같아서.
-시골이라 재료 구하기가 쉽지가 않아. 동네에 뜨개 하는 언니가 있기는 한데 그 언니한테 절대 배우기 싫어.
-알겠어. 기본 뜨기만 배우면 계속 반복되는 거니까 할 수 있긴 할거 같아. 근데 뭐 만들고 싶은 게 있어?
-방석
-어떤 방석?
-내 차 앞자리에 놓고 싶어서.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니까 의자에 자꾸 살이 달라붙어서.
-오케이. 그럼 내가 어떤 패턴으로 하면 좋을지 찾아보고 실이랑 코바늘 준비해 볼게. 근데 어디서 만나지? 몇 시간만으로는 어려울 거 같은데.
-너 시간 괜찮으면 여기 올래? 방갈로에서 자면 되니까.
-이번 주는 안되고 다음 주 토요일은 괜찮을 거 같아.
-다음 주면.... 나도 괜찮아. 나는 애들 때문에 방갈로에서 같이는 못 자고 집에서 자야 하긴 해.
-괜찮아.
현주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방갈로가 있다. 어떤 연유로 현주 남편이 방갈로를 사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일 년에 한 번씩 대학동기들이 현주네 방갈로에서 모인다. 혼자서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다.
#24
유찬이는 주말에 나 없이 혼자 지내게 되는 게 좋은 모양이었다. 내일까지 식사 잘 챙겨 먹으라며 냉장고에 반찬과 냉동실에 얼려놓은 음식을 설명하고 있으니, 밥 차려 먹는 거 잘하니까 걱정 말라며 정 안되면 배달시켜 먹겠다고 한다. 나도 유찬이 오고 매일같이 아이 상태 살핀다고 피곤하기도 했다.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했구나 싶었다.
6월 말이지만 햇볕이 뜨겁다. 음악을 크게 틀고 선글라스로 눈부신 햇살을 막으며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린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목청 높여 따라 부른다. 내 마음껏 노래를 불러도 되는 안전한 장소. 운전하는 것도, 노래 부르는 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풀린다. 그렇게 지루한 줄도 모르고 3시간을 달려 현주네 방갈로에 도착했다.
차를 방갈로 앞에 주차하고 현주차를 타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뜨개는 뒷전이고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카페에서 커피까지 마시고 갈까 하다가 그러면 너무 늦어질 거 같아서 커피 두 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방갈로 향했다.
***
뜨개 덕분에 과음하지 않고 온전히 잘 수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방석 만들기는 시작도 못했다. 기본 뜨기를 익히는 것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말이 방석이지 기본 뜨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어제 서둘러 방석 만들기에 돌입하지 않았다. 현주가 사 온 모닝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며 어제 배운 것을 현주에게 해보라고 한다. 어설프긴 하지만 방석을 만들다 보면 좋아질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말이다.
점심 먹고 2시쯤 출발하려고 했던 계획은 3시간이 늦어진 5시에 출발하게 되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차가 덜 막히는 시간이라 다행이었다. 다음엔 현주가 올라와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출발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유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출발했어.
-네.
-무슨 일 없지?
-....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와서 이야기해요.
-일단 알겠어.
와서 이야기하자니? 뭔 일이 있다는 거야?
너무 궁금해서 다시 전화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뒀다. 어차피 집에 가면 알게 될 텐데 뭘 구차하게 다시 묻나 싶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무슨 일이냐며, 신발도 벗기 전에 물었다.
-잠깐 제방으로....
유찬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방문옆 벽을 가리키는 곳을 보니 천장과 맞닿은 위쪽 벽이 뚫려있었다. 마침 그 벽면은 합판을 덮어둔 벽면이었는데 그 합판이 반원으로 뚫려있었다.
-뭐야? 왜 벽이 깨져있어?
-제가 천장 쪽에 더 가까운 곳을 망치로 두드려야 하는데 감정에 복받쳐서 벽을 치는 바람에 조준을 잘 못해서 합판에 구멍이 났어요.
-왜?.... 왜 감정이 복받친 건데?
유찬이는 금요일 밤부터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주말이고 낮에는 윗집이 비어 있을 거라고 예상을 하고 점심 먹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해드폰을 착용해도 소리가 해드폰을 뚫고 들어왔단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방해를 받고 있으니 점점 감정이 고조되고 화가 났다고 했다. 참다가 참다가 고무망치로 벽을 친 건데 너무 감정이 격양된 나머지 조준을 잘 못했단다.
-그래서 말인데요 엄마, 저 집 나가야 할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