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드라이브도 할 겸 내가 언니네 집 근처로 갔다.
자기네 동네로 왔으니 먹고 싶은 거 사준다고 해서 나의 최애 음식 샤부샤부를 먹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토해내듯 쏟아냈다.
-남들은 내보내려고 하는 나이에 다 큰 아들이 들어왔으니 석희 고생이 많네. 그래서 유찬이 온다고 할 때 좀 걱정이 되더라고 나는.
-그렇다고 언니, 오겠다는 아이를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니까, 그것도 그렇지.
-요즘 유찬이 때문에 너무 마음이 힘든 거예요, 답답하기도 하고. 근데 그 답답함이 평소 느꼈던 답답함 하고 좀 달라서 ‘이게 뭐지?’ 그랬거든요.
-유찬이가 네 마음대로 안 돼서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처음엔 그런 건가 했는데 남편이 없어서 그런 거더라고요. 자식을 유일하게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 맘대로 흉도 보고 작당도 해보고, 분담도 해가며 순수하게 공유할 수 있는 파트너 말이에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유찬이 아빠도 그랬겠다 싶대요.
-어이쿠, 석희 철들었네.
-그래도 언니, 아빠가 재혼해서, 그래서 같이 있기 힘들어서 온 거잖아요. 그럼 고마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말하면 다 싫대요. 이혼해서 상처 준 거 미안하죠.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 주말마다 만나면서 더 이상 상처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단 말이에요. 전학하지 말랬는데 전학해서는 그 고생을 시키더니. 일은 둘이서 치고 왜 뒤치다꺼리는 내가 하냐고요? 아니할 수는 있어요, 그럼 좀 협조를 하든가?
-주말마다 애들 만나고 한 게 애들이 원한 거야? 물론 네가 그만큼 해서 아이들이 잘 컸지, 석희 너도 고생했고. 근데 아이들이 원해서 한 걸까?
-저 좋다고 한 거기도 하죠. 맞아요. 아이들이 원했다기보다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한 것도 인정해요. 하지만 유찬이가 지금 심리적으로 불안해진 것은 지 아빠 재혼 때문이잖아요. 근데 왜 오롯이 나 혼자서 아이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힘들어야 하는지 억울해요.
-이런 말조심스러운데... 유찬이가 자기도 모르게 엄마, 아빠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 아닐까? 복수라는 말의 어감이 좀 그렇다... 그러니까 ‘당신들도 좀 힘들어 보세요’라는 무의식의 마음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사실 내가 어렸을 때 그랬거든. 부모에게 상처받은 마음에 복수할 거야 라는 마음을 먹었던 기억이 나거든.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부모의 이혼, 아빠의 재혼으로 나보다 더 억울할 거 같은 아이에게 고작 몇 달 동안의 힘듦으로 아이에게 억울한 에너지를 풍겼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 재산을 잃은 사람 앞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억울하는 꼴 같았다.
다은언니의 말에 깊은 공감이 되었다. 유찬이가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찬이 마음의 빈 공간이 혹시 불안으로 채워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살지 못한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은 다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10년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유찬이는 받지 못한 것을 받아 채울 기회, 나에게는 해주지 못한 것을 해줄 수 있는 기회. 억울해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 집중해서 채워주자 라는 결심을 했다.
-집에 혼자 있으니 좋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부러 약속 만들어 나갔다 온 건데.
-서운했어요? 일부러 안 나가도 돼요. 그냥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한 건데.
-농담이고, 있잖아 유찬아, 엄마가 할 말이 있는데...
-무섭게 뭐예요? 뭔데요?
-무섭기는. 사실 엄마가 너 오고 이래저래 힘들었어. 요즘은 너 밥 차리고 출퇴근 도와주고 또 엄마 일하고 하면서 엉덩이 붙일 시간이 없더라고. 엄마 입장에서는 10년 동안 안 한 일을 몰아서 할라니 솔직히 버겁기도 했어. 네가 알아주겠지라는 마음도 있었나 봐. 근데 엄마가 결심했어. 내년까지는 엄마가 다 해줄 거야. 그니까 너도 엄마한테 받고 싶었던 거, 요구하고 싶은 거 있으면 내년까지 열심히 요구해. 알겠지?
-내년이요? 왜 내년까지예요?
-왜가 어딨어! 엄마도 엄마 인생 살아야 할거 아니야! 내년이면 엄마 50살이니까 그때까지만 해줄 거야. 너도 나도 각자 살길 찾아야지.
-하하하. 알겠어요.
유찬이를 원래대로 회복시키겠다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와 전 남편 중에 누구 때문에라는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남의 의견 따위도 필요 없다. 유찬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기까지 나는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35
윗집이 이사를 들어오고 아이들이 없으니 층간소음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유찬이는 크게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까지 깨어있던 것도 윗집뿐만 아니라 외부의 소음에 때문에 잠이 드는데 오래 걸린다고 했다. 아침 일찍 GS마트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은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해드폰으로 백색소음을 듣기도 한단다. 낮에 공부방 수업 중에는 가끔 3D 귀마개를 끼고 있지만 오래 끼면 귀가 아프고 자꾸 빠진다고 했다.
전반적인 층간소음은 줄었지만 이번엔 이른 아침부터 걷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날 아침 안방에서 ‘웅~’하는 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서 확인차 윗집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안방 쪽에 전자제품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으니 없다면서 들어와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확인 안 해도 된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괜찮다며 들어오라고 해서 확인하고 짧게 인사를 나눴다. 부부과 성인아들, 시어머니가 산다고 했다. 새벽에 걷는 소리가 좀 크게 나기는 한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일찍 일어나시는 편이시라, 슬리퍼 신으셔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자꾸 잊으시는 거 같다면서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겠다고 한다.
소리에 대해 예민한 유찬이를 위해 내가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집을 나가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회피하려고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찬이는 자기 나름대로 하루하루 살아낼 방법들을 찾으며 지내고 있었나 보다.
귀마개를 착용해야 한다면 스펀지로 된 저렴한 귀마개 말고 좀 비싼 귀마개를 하면 효과가 있으려나 생각하다, 문득 맞춤형 이어 플러그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가수들은 자신의 귀에 맞는 인이어를 제작하니까... 귀를 본떠서 귀마개를 맞추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생각해 놓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 너무 멋졌다. 바로 검색을 했다.
‘맞춤형 귀마개’ ‘맞춤형 이어 플러그’
있다, 있어. 너무 기뻤다. 보청기를 취급하는 곳에서 제작가능하다고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큰 소음이 있는 공사장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도 맞춤 귀마개를 주문하는 경우도 많았다. 주파수를 조절해서 사람 목소리만 들을 수 있게도 제작되기도 한단다.
검색해서 나온 곳 중에 그래도 가까운 곳에 전화를 했다. 보청기 회사였다. 직접 방문해서 귀를 본떠야 하고 제작기간은 5일~7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한쪽당 10만 원이라고 한다. 합이 20만 원.
가격이 어느 정도 일까 예상하고 문의한 건 아니었지만 가격을 듣는 순간, ‘헉’ 했다. 또 다른 곳도 전화해 보았다. 거긴 18만 원, 20만 원 등 소재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비용이 중요한가? 유찬이가 좀 편해질 수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해줘야지 싶었다. 아직 유찬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조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눠야 할거 같았다. 주말이라 아빠가 점심 먹자고 해서 나갔던 유찬이가 들어왔다.
-유찬, 유찬! 내가 아주 기가 막힌 생각을 했다는!
-크게 기대는 안되지만, 뭔데요?
-말을 해도 꼭! 됐고, 맞춤 귀마개가 있다는 사실. 엄마가 갑자기 유명한 가수들은 팬들이 인이어를 맞춰주는데 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그럼 맞춤 귀마개도 있지 않을까 해서 알아서 찾아봤더니 있더라고. 너 생각 있어?
정말 기대를 안 했는데 내가 생각지도 않은 발언을 한 모양이다. 애써 침착한 척하는 것이 보였다.
-신기하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좀 비싸더라고. 그래도 뭐 도움이 된다면 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나 하는데요?
-소재에 따라 좀 다른 거 같긴 하더라고. 18만 원~20만 원이고 엄마가 알아본 데는 40분 정도 가야 하는 곳이긴 해.
-가까운 곳은 없어요?
-웬만한 보청기 만드는 곳에서는 다 제작해 주는 거 같기는 하더라고.
-저도 좀 알아볼게요. 정말 효과가 있는지도 좀 알아보고요.
나는 생각이 들면 바로 행동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유찬이는 신중하고 효율성을 따지는 아이다.
덕분에 나도 주말 동안 관련 업체나 관련 글 등을 더 찾아보았다. 그리고 집 근처에도 맞춤 이어 플러그를 제작해 주는 곳도 찾았다. 가격도 좀 더 저렴했다. 유찬이가 맞추고 싶다고 하면 이곳에 가봐야겠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했는데, 유찬이가 영상 하나를 보냈다. 가수들 인이어를 만들어주는 음향회사에서 맞춘 귀마개를 사용하고 올린 후기영상이었다.
-엄마, 저는 여기서 맞추고 싶어요.
-엄마도 영상 보니까 여기도 괜찮은 거 같기는 한데, 제작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 최소 3주~4주라는데, 엄마가 알아본 곳은 집에서 가깝고 5일이면 된다고 하더라고. 하루라도 빨리 사용할 수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까지도 지냈는데 한 달 정도 더 못 참겠어요? 전 여기서 하고 싶어요. 가수들 인이어 만드는 곳이라고 하니까 뭔가 더 전문적인 느낌이 들어요.
-나라면 빨리 제작해 주는데서 할 거 같은데, 기다릴 수 있다니 그게 더 대단하다.
알겠어.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하는 건데? 엄마 다다음주면 학교 개학이라 시간 없어. 개학전이면 오전 중에 다녀와서 공부방 수업 할 수 있을 거 같아. 너도 아르바이트 겹치지 않아야 하잖아.
-전화로 예약하는 게 빠르다고 나와있더라고요. 그럼 예약할게요.
최근에 유명한 여가수 가방을 공개하는 영상에서 잠잘 때 꼭 필요한 물건이라 가지고 다닌다면서 소개가 된 이후에 예약이 몇 배로 많아졌단다. 그래도 개학하기 전인 다음 주 화요일 오전에 예약을 했다.
***
예약시간 10시에 맞춰 가려면 9시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건물로 들어서니 간단히 예약자 확인을 하고 결제를 먼저 진행했다. 그리고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1층은 음악에 관련된 장비들이 즐비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유명한 가수들이 이곳에서 인이어를 맞추고 착용한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수면용 귀마개로 주문서를 작성하고 귀마개 색상은 투명으로 골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늘 주문을 넣으면 6주 후에나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주문이 늘어서 보통은 4주~5주 정도 걸리는데 공교롭게 4주 후에 추석연휴가 있어서 넉넉잡고 6주를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였다.
유찬이와 눈이 마주쳤고 난, ‘괜찮겠어?’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유찬이는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제사 직원은 귀본을 뜨겠다며 유찬이를 자리로 안내했고, 잠시 후 직원이 분홍색의 귀본 뜨기 재료가 든 큰 주사기를 가지고 나와 먼저 귓구멍에 탈지면을 넣고 주사기로 재료를 귀 안에 넣었다. 그렇게 양쪽을 막고 5~7분 정도 기다렸다. 완성된 귀본을 확인하고 완성된 귀마개를 받을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혹시 사용하다가 분실해서 다시 제작하고 싶을 땐, 귀본이 있으니 전화로 주문만 하면 된다는 안내까지 듣고 우리는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