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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기 Jun 02. 2024

프렌즈: 로스 겔러

우나기~



# 본문은 작품에 대한 중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스 겔러, 어째서인지 친구들이 프렌즈를 보기 시작하면 굉장한 진입 장벽으로 꼽는 인물이다. 내 친구들만 그런 것은 아닐 텐데, 로스가 특히 레이첼과의 관계에서 하도 뻔뻔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때문에 로스의 만행을 답답해하거나 심지어는 분노하기도 한다. N회차의 대표작품 프렌즈를 보던 나 역시 1, 2회 차를 달리던 차에 로스를 보며 뒷골이 땅기는 지경(25%의 과장이 섞였다)에 이르렀었다. 그만큼 배우가 연기를 기깔나게 해 주었음을 체감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웃기다고 손에 꼽는 장면에 로스가 빠진 적이 없다. 무림 고수를 흉내 내며 "우나기~(장어)"를 찾거나, 침대 운반을 전두지휘하며 "Pivot!"을 외치는 등 현실에서 겪어본 적이 없는 효과음과 표정, 그리고 대사로 혼을 쏙 빼놓는다. 그만큼 웃기다는 뜻이다. 난 웃기면 그만이라는 주의이므로, 웃긴 로스라는 캐릭터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하게 되었다. 싫어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 로스 겔러를 색다른 방식으로 소개해보고자 한다. 





다정함


로스는 정말 다정한 캐릭터다. 이 많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공감능력도 높다. 삼고초려가 가장 잘 먹힐 캐릭터일 것이다. 로스는 한 번 "진짜 하기 싫어!"라고 주장했어도 불쌍한 표정으로 3번 정도 되물으면 "그래, 어쩔 수 없지" 라며 들어줄 인물이다. 실제로 종종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일갈하는 단호함은 있지만, 그럼에도 상대가 큰 상처를 받았다 싶으면 눈치를 채고 접고 들어갈 만큼 정이 많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자신의 가치관이 매우 확고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기 때문에 상대가 상처를 받기 전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피력하는 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속 로스는 상대의 심금을 울리는 말을 잘하는 인물이라는 설정이다. 한 에피소드에서 로스가 부모님 관련 행사에서 사회를 보면 부모님, 일가친척 등 청중이 모두 눈물을 훔치는 통에 모니카가 대체 뭘 어떻게 하는 거냐고 반응한 적도 있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잘한다는 것은 로스가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 사이 관계에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피비가 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아이들용 자전거를 선물한 적이 있다. 


이처럼 로스가 관계적으로 충실하고 정이 많다는 점은 다른 인물들도 잘 이해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로스의 생일을 위해 평소보다 큰 금액을 부담하자는 챈들러의 제안이었다. 금액을 말하자 그만큼이나 모으냐고 놀란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에게 챈들러는 "그래도, 로스잖아."라고 답하고, 모두 여기에 수긍한다. 금액보다도 그 태도에서 로스가 평소 친구들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납득할 수 있다. 





이해심


로스는 이해심이 넓은 인물이다. 과거 연인이자 전부인인 캐럴과의 관계에서 이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 로스는 캐럴과 결혼한 수잔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는데, 사실 이 관계는 로스의 이해가 없었다면 성립할 수 없다. 결혼해서 잘 만나고 있었던 부인이 바람이 났는데, 알고 보니 레즈비언이었고, 이혼을 했더니, 둘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까지 전해 들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심지어 로스는 캐럴이 유일무이한 연인이었고 이외에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로스가 관계에 굉장히 충실한 인물임을 고려하면, 캐럴과의 관계가 그런 식으로 종결된 사건이 인물에게 얼마나 큰 충격사건이었을지 감을 잡을 수 있다. 로스는 마음을 주고 싶은 대상이 생기고 가까운 사이가 되면 특히 연인을 다른 관계보다 훨씬 우위에 두고 모든 것을 쏟아붓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캐럴과 만나 결혼을 결심하고 실제로 가정을 꾸리는 과정에서 로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 대상에게 온전히 몰입하고 관계에 매진할 수 있으니 매우 행복했을 것이다. 다만 캐럴의 성적 지향성을 고려해 보면 끝에 가서는 관계적으로 갈등도 많았을 거라 예상된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캐럴이라는 전 연인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로스는 캐럴로부터 갑작스럽게 아들이 생겼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 로스의 성격에 이상적이고도 온전한 가정을 꿈꿨을 테지만, 이혼한 뒤 생긴 자신의 아들이라는 존재 역시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긴다. 캐럴이 낳은 아들인 벤은 로스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이고, 실제로 로스는 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주기적으로 양육을 하기 위해 이사도 멀리 가지 않는다. 작품 내내 양육에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캐럴의 말을 뒤로하고 로스는 벤과 친밀한 관계를 일구고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캐럴이 수잔과 결혼식을 연다고 했을 당시 로스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굉장히 납득 가능한 의사를 표현한다. 그렇지만 캐럴이 울면서 로스의 집에 찾아와 부모님 및 연인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말하자, 로스는 무려 캐럴의 현 여자친구인 수잔의 말에 동의하며 결혼식을 추진하라고 격려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본인이 직접 결혼식에 참석해 캐럴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결혼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녀의 부모님을 대신하여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해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로스라는 사람에게 관계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를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인물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수잔과 캐럴이 반나절 간 로스에게 벤을 맡기고 떠나려 할 때, 로스는 벤에게 "엄마들에게 인사해야지~"라고 하는 등 수잔을 배제하거나 셋 사이의 감정을 양육까지 끌어오지 않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벤이 태어날 때 피비가 "셋이 자기가 더 좋은 양육자가 되고자 싸우는 모습을 보니 아이가 참 행복하겠다"라고 했던 것처럼 든든한 지원군을 두고 성장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같은 실수를 왜 반복하는가에 대하여


로스는 캐럴과의 결혼생활이 '실패'로 돌아간 후 여러 연인을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그 관계가 썩 성공적으로 이어진 적은 없다. 레이첼에 대한 로스의 마음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에 레이첼과의 관계도 수없이 갈등을 빚어 시즌이 지나도록 재결합을 하지 못한다. 이유는 물론 복합적이겠지만, 대표적으로 지나친 관계로의 몰두가 공통적인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로스는 관계에 충실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렇지만, 모든 삶과 관계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로스는 결혼을 인생의 주요 목표로 생각하고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물론 그런 인물은 많겠지만, 이를 위해 어떤 희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지를 물어봤을 때 프렌즈 6인 중 로스가 가장 많은 역경을 감당할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로스는, 작품 속에서 종종 피비가 "캐럴이 로스를 망쳐놓았다"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캐럴과의 관계가 그런 식으로 끝난 것에 대한 충격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 


로스는 레이첼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관계에 몰두하고, 몰두하는 만큼 반응을 보여주는 연인 레이첼의 모습에서 큰 안도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우연한 기회로 직업적 정체감을 찾아 시동을 걸기 시작하는 레이첼의 모습에서 불안을 느낀다. 우선 절대적으로 관계에 할애할 시간이 줄어들었을 테니 로스가 원하는 만큼 만날 수 없었고, 연락도 어려웠다. 레이첼은 당시 처음, 게다가 잘하고 싶은 직업적 환경에 속하게 되었으니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최대의 에너지를 써버렸을 것이다. 따라서 관계에 이전만큼 반응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캐럴과의 관계가 급작스럽게 끝난 적이 있는 로스 입장에서는 레이첼과의 관계는 정말이지 언제 종결될지 모르는 서스펜스이다. 게다가 레이첼을 학생 때부터 좋아했으니, 힘들게 연인이 된 만큼 잃기 싫다는 불안이 커져 되려 일을 그르치는 집착으로 번졌다. 로스는 일반적으로 상식이 부족한 인물이 아니다. 특정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옳은 지를 잘 이해하고 있고, 학력도 6명 중에서 가장 높고 젊은 나이에 교수를 하게 되는 명석한 인물이다. 그런데 관계에 지나치게 몰두했을 때 눈에 뵈는 것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직장'에 있는 레이첼에게 '부적절한' 연락과 방문, 선물 공세를 퍼부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그러자 예견된 일이나 마찬가지로 레이첼과 갈등이 생겼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면 당연히 납득이 되는 수순인데, 관계적 몰두와 불안이 가장 큰 키워드가 되어있는 로스의 상태에서는 이후의 적절한 행동마저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레이첼 입장에서는 굉장히 답답했을 것이다. 앞에서는 알겠다고 하고 말이 통하는 듯 보이는 사람이, 언제 어떤 식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모르니까 말이다. 레이첼의 직장 동료인 마크에게 관심이 없다고 아무리 피력해도 믿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이후에도 갑작스럽게 에밀리와 사랑에 빠졌을 때 로스는 급 결혼을 추진한다. 그 이유가 물론 본인은 그만큼 에밀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겠지만, 에밀리와 관계가 종결될 까 불안했기 때문인 면이 더 크다. 에밀리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데이트를 이어오고 있었고, 로스의 인생에 우연히 등장했다. 우연히 등장한 사람이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 놓치지 싫은데, 거주지가 영국이고 직장도 거기에 있다 보니 언제 자신을 떠날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벤이 있으니 로스는 미국을 떠날 수 없고 다른 방법을 찾는 중에 에밀리가 관계의 진전이 있는 상황이라면 이사 올 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로스는 솔루션을 찾은 양 번뜩이며 갑자기 청혼한다. 


물론 안정적이고 좋은 관계라는 것에 무조건 시간이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만난 시간이 짧아도 충분히 질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로스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리스크가 있는 이벤트였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또 본인의 이슈가 관계 단절에 대한 불안 및 그로 인한 집착이라는 점을 고려했다면 에밀리에게 다른 조건은 고려해보지 않고 청혼하는 충동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스가 관계를 그르치는 데 있어서 주된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 안정적인 관계를 더 빨리 찾고 그 관계에 몰두하고 싶어 하는 점, 그를 통해 실패한 지난 결혼 생활을 보상받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상적이고도 필수적인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고 싶어 하는 점. 바로 이 과정에서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조망하지 못하는 점 등이 합을 이루어 시청자인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이다. 결혼의 실패를 누구보다 질색할 인물인데, 결국 6인 중에 가장 많은 실패 기록을 달성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끔은 자신의 약점과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면이 더 큰 위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뭐 하나 잘못된다고 내 인생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숙고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바람직성


로스라는 인물의 성장 배경을 고려해 보면, 부모님이 항상 칭찬을 일삼았다. 로스가 학교에서는 존재감이 없고 괴짜였을지 모르겠지만, 공부를 잘하고 항상 성취가 좋았던 터라 부모님이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동생인 모니카는 무시하되 로스는 추켜세워주는 면이 있었다. 지속적으로 인정을 받고 또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 온 로스는 본인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이를 정당화하려고 하고, 타인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면 못견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례로 처음 이사왔을 때 아파트 관리인의 은퇴식을 위해 돈을 내라고 하자 이제 이사온 사람에게 돈을 내라는 요구가 옳지 않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피비 같은 사람이 같은 입장에서 그 요구를 거절했다면 자신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고수했으니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무시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로스는 자신이 옳은 행동을 했는데 상대에게서 비난과 조롱을 듣자 굉장히 억울해한다. 나아가, 자신이 옳았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아무도 반기지 않을 파티를 여는 등 많은 노력을 들인다. 


레이첼과의 관계에서 자주 회자되는 "우린 그때 헤어진 상태였어 (We were on a break)"라는 말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로스가 잘못했다고 10명 중 7명은 말할 수 있을 테지만 본인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했다거나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레이첼을 아주 좋아하고 재결합을 목표로 하면서도 그 말을 참지 못해 다시 일을 그르치는 이유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사람으로 비춰지려는 욕구가 매우 큰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이 있으니 언제나 바람직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만 기능할 수는 없고, 그래서 인간답다. 그렇지만 로스의 경우, 항상 바람직한 행동을 일삼는 능력 좋은 최고의 아들로 자랐으니 그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로스에게 이혼 3회란 더 큰 충격인 것인데, 이를 성숙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그 사실 자체만 숨기려고 하는 탓에 일을 더 크게 벌인 적도 있었다. 이후 이혼 경력이 3회라고 모니카가 부모님 앞에서 폭로하자, 부모님은 "그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거니" 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부모님의 로스에 대한 기대와 이에 부응하려던 그의 과거 노력을 여기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로스는 괴짜처럼 비칠 때가 많지만, 진중할 때에 상식을 벗어날 만큼의 이해심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 다른 5명의 친구들과 모두 유사한 정도의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특징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로스는 어떤 캐릭터와 단 둘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는 피비와 챈들러 / 조이와 모니카가 같이 나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장면을 주도하는 장면을 생각해 봤을 때 더 잘 체감할 수 있다. 로스는 모두와 비슷한 수준의 유대 관계와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안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쪼잔하고 간혹 답답하고 고지식하지만 웃긴 로스라는 캐릭터가 들어가 있어서 프렌즈를 재밌게 시청할 수 있었으므로, 그 마음이 글에서 잘 드러났다면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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