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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기 May 26. 2024

프렌즈: 챈들러 빙

헤어지자, 아니 나 사실 예멘가. 언제 가냐고? 내일.

# 본문은 작품에 대한 중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챈들러 빙이라는 캐릭터는 이제껏 내가 만난 하고 많은(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애정하는 인물이다. 나만이 느끼는 평가가 아니었던지라, 챈들러는 방영 당시부터 종영하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되며 최고의 캐릭터라고 호평을 받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챈들러가 작품 내내 보여주는 비꼬기(sarcasm)유머가 프렌즈를 계속 보는 최대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누가 나에게 6명 중 어떤 친구랑 가장 잘 맞을지 묻는다면 단연 챈들러라고 대답할 수 있다. 레이첼이 적당한 친구 사이를 유지하며 지낼 수 있는 가장 사회성 높은 캐릭터라고 한다면, 챈들러는 공략 시 꽤나 고행이 예상되지만 한 번 친해졌을 때 가장 즐겁고 마음이 편안할 것 같은 인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헤어질 수도 없는데요 차라리 예멘에 가겠습니다.


챈들러는 사회적으로 어색한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그렇다고 반사회적이거나 아주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통계 데이터 분석...어쩌구에 관한 회사생활을 일찍 시작해서 높은 자리로 빠르게 승진할 만큼 능력도 있고 사회적 눈치도 빠르다. 다만, 미성숙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싶어 하며 안 좋은 소리를 잘 못한다. 사실 아예 못하는 수준이다. 미성숙한 모습은 시즌 초반에 회사에서 다수의 장난감을 책상에 쌓아둔다거나 실제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몰래 담배를 피기도 하며, 승진해서 사무실을 갖게 되었을 때는 비서가 생긴 사실이 신기해 계속해서 비서를 호출하는 등의 여러 장면으로 알 수 있다. 이런 모습이 조이와 잘 어울리는 하나의 이유가 되는데, 실제로 둘이 있을 때 흥미진진하고도 이상한 게임을 많이 한다. 조이와 처음 친해진 계기도 같이 앉아서 흥미로운 TV 프로그램을 보며 맥주를 나눠마셨기 때문이었고 별 거 없었다.


미성숙하거나 장난기 넘치는 모습보다도 사회적 장면이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싫은 소리를 못하는 점이다. 챈들러의 이 부분은 실제로 그 삶에 지장을 줄 만큼 심각하다. 예를 들자면 많은데, 우선 승진하고 관리직을 맡았을 때 실적을 내지 못하는 부하 직원을 해고하지 못한다. 자신을 똘망하게 쳐다보는 부하직원을 보며 너 그만 나오라고 안 좋은 소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당연히 잘린 사실을 모르니 계속 출근하는 부하직원에 대해 챈들러의 상사가 의문을 표명하자 "정신질환이 있어 자신이 잘린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류의 거짓말로 대응한다. 물론 재미있는 장면인 것은 맞지만, 실제로 걸리기만 한다면 회사에서의 입지가 곤란해질 만큼 부적절한 대응이다. 자신이 해내지 못한 일을 가리기 위해 그때마다 거짓말로 응수하면 이후 눈덩이처럼 불어난 거짓말을 감당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악순환에 처하게 한다.


다른 예시도 많다. 공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가까운 타인, 연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오래 만났던 제니스와 헤어지지 못해 피비와 함께 만나서 피비가 '대신 헤어져준 적'도 있다. 또다시 만났을 때는 제니스가 하도 싫어서 당장 헤어지고 싶지만 그 말을 하지 못해 예멘으로 출장을 간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다. 이때 공항까지 따라온 제니스 덕분에 예맨행 비행기 티켓을 실제로 구매하고 비행기까지 타러 들어간다. 누가 봐도 득 보다 실이 많은 상황인데, 헤어지자는 관계의 단절을 알리는 한 마디를 하지 못해서 그 사달이 난 것이다. 이외에도 레이첼의 상사 조애나와 다시 만나지 말자는 말을 하지 못해 자동응답기처럼 '또 만나서 밥 한번 합시다'라는 멘트를 헤어질 때마다 반복해 조애나에게 기대를 주는 탓에 레이첼을 미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레이첼이 그냥 아무 말 없이 헤어지라고 하자 '어떻게 사람 면전에 대고 그렇게 하냐'며 곤란해했다.


흥미롭게도, 모니카 겔러와 챈들러 빙은 둘 다 쓴소리를 못하는 스타일이다. 모니카는 자신이 비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해 특히 레이첼의 생일파티에 레이첼의 어머니를 초대하길 잊었을 때 어머니의 화를 풀어드리기 위해 지나치게 애를 쓴 끝에 되려 더 큰 비난을 받게 되는 굴레에 놓인 적 있다. 사실 다른 사람의 감정은 우리가 책임져줄 수 없는 영역으로, 통제 밖에 있다. 그런데 그 반응 하나에 너무 연연하다 보면 해야 될 일을 못하게 될 때가 있고, 챈들러는 특히 부정적인 반응을 너무 크게 신경 쓰다 보니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된다. 모니카와 챈들러 둘 다 이런 모습이 있다 보니 제니스가 둘의 결혼식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쩔쩔맨다. '불편하니 오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이 둘에게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둘이 함께 챈들러의 상사를 만나면 하나도 재미없는 이상한 상사의 개그에 계속해서 웃어주는 우스운 장면이 연출된다.





광대


친구들이 레이첼을 위한 깜짝 생일파티를 열었을 때, 레이첼이 그거라면 챈들러 생일이 더 빠르지 않아?라고 짧게 언급한다. 당시 챈들러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한 것이 레이첼 뿐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챈들러의 직업을 묻는 스피드 퀴즈 질문에 그 누구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거나, 챈들러가 갑자기 안경을 쓰기 시작했을 때 모두가 너 원래 쓰지 않았어?라고 반응하는 등 나머지 캐릭터들에 비해 자주 무시당한다. 이는 챈들러가 평소에 자처하는 캐릭터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챈들러는 풍자가 기본이고 질문을 했을 때 뻔한 질문을 하면 이를 비꼬아 대답하는 통에 친구들이 '멀쩡히 답할 수는 없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멀쩡히 답할 수는 없다. 챈들러는 자신의 유머와 유머를 하는 자신이라는 자아를 매우 중시한다. 모니카가 자신보다 웃긴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 때 매우 자존심이 상해 무리해서 유머를 쥐어짜 낸 적도 있다. 그게 본인의 자아인데 이를 건드리면 어쩐단 말인가. 즉, 챈들러는 무리에서 '웃긴 애'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고 본인도 알고 있다. 따라서 그 포지션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이에 맞게 행동하는데 별개로 그런 모습 탓에 친구들에게서 간혹 무시당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상 챈들러는 박식하고 사회적 단서도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유머라는 것은 고차원적이고 세련된 방어 기제인데, 챈들러가 던지는 유머는 상황에 적합하고 이런 멘트가 지속적으로 나온다는 부분에 미루어 그가 굉장히 똑똑한 사람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지나칠 때는 독이 되지만, 유머를 시기 적절히 활용했을 때 사회적 불편감을 낮춰주는 효과도 있다. 챈들러는 피비나 조이, 레이첼 등 친구들에 비하면 다소 내향적인 캐릭터로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관계의 흐름을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유지하기 위해 유머를 종종 사용하기도 한다.





이해와 수용


프렌즈를 계속 보며 재밌다고 느꼈던 포인트 중 하나로 레이첼과 챈들러의 관계가 있다. 물론 다들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 사이지만, 레이첼과 챈들러는 의외로 특히 친하다. 물론 프렌즈 중 로스와 조이의 경우 같은 남자끼리고 로스와는 룸메이트였으며, 조이와는 가장 절친한 사이로 꼽을 만큼 가깝다. 다만, 챈들러와 피비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둘 사이의 에피소드가 많지 않은 편이고, 챈들러가 모니카와 만나기 시작할 때 서로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 됐다'는 식으로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실제로 레이첼이 일 적으로든 관계적으로든 힘들어할 때 챈들러가 레이첼을 위로해 주는 장면이 다수 등장하며, 챈들러가 힘들어할 때 사진처럼 레이첼이 가까이서 이해해주기도 한다.


레이첼의 경우 이전 회차에서 타인에게 공감적이고 경청하며 일단 수용을 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분석한 바 있다. 챈들러는 자기 스스로가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은 넓지 않지만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마찬가지로 수용하는 스타일이다. 레이첼과 챈들러라는 두 인물이 모니카 겔러와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점에 착안하면 이러한 공통점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모니카는 어린 시절 내내 오빠라는 존재와 비교의 대상이 되며 자랐고, 그 안에서 한 번도 자신이 더 잘났다고 인정받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이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하며, 철저히 계획해 주변 환경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챈들러도 마찬가지로 부모님에게 수용받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즌 초반에는 13세 즘(더 어릴 수도 있다), 부모가 이혼 단계를 밟던 때부터 흡연을 시작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다만 힘겨운 유년기를 보낸다는 사실 자체가 누군가에게 결함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챈들러는 타인의 불안이나 고통,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잘 느끼거나 이해하는 것 같다. 물론 상대의 부정적 반응에 민감해서 안 좋은 소리를 못하지만, 반대로 효과적인 소통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어떤 특성은 무조건 좋거나 나쁘지 않고, 활용하기 나름이다. 다시 돌아와서 챈들러는 상대의 부정적 감정을 잘 느껴 모니카와의 관계에서 설령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겨도 일단 한 템포 쉰다. 이후 생각을 가다듬은 뒤 상대의 주장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면 자신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이해심을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니카와 잘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서, 억압


그렇지만 챈들러는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의 폭을 잘 말하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본인도 주구장창 언급하듯 방어기제로 부적절한 농담을 사용하는 한편 '억압'도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챈들러와 부모님과의 상호작용을 봤을 때 엄마는 자주 그를 떠나 일에 집중했고, 아빠는 자신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탐색하고 과업을 해결하는 통에 어릴 적부터 혼자 지내는 때가 많았다. 같이 있어도 부모님이 함께 있었다면 자주 싸웠을 것이고(성인이 되기까지 몇십 년이 흘렀지만 마주치면 서로 신랄하게 헐뜯는다), 정서적 교류가 드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모와 자녀 사이 정서적 상호작용은 매우 중요한데, 이 과정에서 자녀는 정서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조절하며 스스로를 이해하고 또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운다.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무작정 밖으로 나오지 않게 억압한다고 능사가 아니며(결국 터져 나오게 된다),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전략을 익혀야 한다.


관련된 중요한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챈들러의 어머니가 등장하는 회차에서 로스는 시련 아닌 시련에 대한 슬픔을 겪고 있던 차에 챈들러의 어머니와 키스를 하게 된다. 이 장면을 조이가 보고 어찌저찌 챈들러에게 고백하게 되는데, 챈들러는 누구보다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갈등을 잘 알고 있는 로스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데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 분노를 어머니에게는 표현하지 못하는 점을 짚어 로스가 어머니께도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아보라'고 조언하게 된다. 그때 챈들러는 거의 처음으로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점(갈등이 예상되기 때문이고, 이를 피하고 싶어서 아예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와 정서적 상호작용을 해본 적이 없다는 점과 같은 이런저런 어색함을 견디고 자신의 분노와 슬픔, 고쳐주었으면 하는 부분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바로 이 경험이 챈들러에게 관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챈들러는 이 사건을 통해 로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데, 이전까진 어머니에게 별다른 기대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체념하고 혼자서 감정을 삭였지만 실제로 말을 했을 때 관계가 개선되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수용받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경험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이후 로스와 레이첼이 처음으로 결별했을 때는 관계가 손상된 것에 대한 긴장과 불안, 부모님의 이혼이 재현되는 상황에 대한 불편감을 견디지 못하고 굴뚝처럼 담배를 피우며 일초에 한 줄씩 농담을 던지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프렌즈의 시즌이 푸짐하게 10까지 있는 덕분에 챈들러가 점차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도 세상이 두쪽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습하는 모습,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 정서적 상호작용을 편안히 여기게 되는 모습 등 다양한 차원을 관찰할 수 있다. 어릴 적 부모님과의 관계가 물론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우리의 삶에는 그 외에도 다양한 경험이 있고 인간은 성장하는 회복탄력적인 존재이므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사실 내 이름 '빙기'의 빙은 챈들러 빙의 빙이기도 하다. 말이 웃긴데, 그만큼 좋아한다.


챈들러는 정이 많은 인물로, 조이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하다. 조이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진 것 없는 상태에서 계속 정진할 때 학원비를 내주는 가 하면 전기세부터 별별 비용을 죄다 부담했다. 이후에도 룸메이트의 종결이 다가오자 자립할 조이를 걱정해 어떻게든 돈을 주려고 기를 쓰고 말도 안 되는 내기 게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모니카와 이사 갈 집을 논의할 때에는 다락방을 두고 조이가 늙을 때까지 살 수 있도록 해야지.. 라며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인 소리를 한 적도 있다. 이런 조이와 챈들러의 관계를 통해 많은 감명을 받았다. 과연 누가 친구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인생을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까운 관계를 더 신뢰하고 돈독히 여기며 아낀다는 점을 잘 표현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런 훈련을 위해서라도 프렌즈를 추천한다. 특히 챈들러는 자신이 정서적으로 수용받은 기억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수도 없이 어깨를 내어준다. 그러니까 정서적 교류, 뭐 연습하면 안 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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