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회, 감정을 배우는 시간
작은 사회, 감정을 배우는 시간
3학년 교실은 어른들의 사회를 압축해 놓은 작은 세계다. 이곳에는 욕망이 있고, 표현이 있고, 은근한 권력도 존재한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 욕망은 살아 있다는 증거고,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증거를 내보인다. 어떤 아이는 말로, 어떤 아이는 행동으로, 또 어떤 아이는 조용한 침묵으로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다. 욕망은 때로 소리 없이 움직이고, 침묵의 합의로 이뤄진 거래처럼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걸 ‘어른스럽다’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권력 없는 자의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쉬는 시간, 여자아이 셋이 책상 모서리에 모여 쪽지를 주고받는다. 슬쩍 들여다본 쪽지 한쪽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일도 우리끼리만 놀자. OOO은 진짜 이상해. 걔는 우리 그룹 아니야.” 단순한 메모 같지만, 그 안엔 분명한 ‘배제의 권력’이 숨어 있었다.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라는 욕망은, 때론 ‘누군가를 제외하고 싶은 욕망’과 겹쳐 있다. 욕망에는 이중의 그림자가 있다. 아이들은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울타리가 타인을 밀어내는 순간, 편이 갈리고, 눈물이 흐르고, 무언의 상처가 남는다.
교실은 매일매일 욕망으로 살아 움직인다. 더 칭찬받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만 놀고 싶고, 내 생각을 더 당당히 말하고 싶은 마음들이 충돌하고 흔들리며 부딪힌다. 그 욕망은 때로 어긋나고,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시작이자, 성장의 징후 아닐까. 어른들이 “당연하지, 너도 그러고 싶지?”라고 단 한 번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아이들의 욕망은 훨씬 덜 날카롭고 더 건강하게 피어날 수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교실에서는 게임이 시작되었다. 남자 대 여자, 익숙한 팀 구도. 그런데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분위기는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여자들은 맨날 소리만 질러서 이기잖아요!” “남자들은 힘으로만 하잖아, 치사해!” 날카로운 말들이 튀어나오고, 눈빛이 흔들리고, 분위기는 장난과 진지함 사이 어딘가에서 불편하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단순한 경쟁을 넘어 성별 간의 정체성과 자존심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곧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난 고요한 사회 고요한 교실을 추구하고 선호하는 교사다. 분쟁과 충돌, 불통의 느낌이 몰려오면 패닉상태가 된다. 내색은 안 하지만. 인간의 민낯은 늘 침묵 속 동요를 일으킨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임을 또 상기시키며 미소 짓는다. 자본주의 미소일지라도 릴랙스가 필요하다. 팀배틀은 늘 충돌과 소요를 일으키지만 그만큼 몰입도가 큰 교수학습방법도 없다. 인간의 순수한 승부욕으로 학습효과를 200배 올린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지는 것에 대한 분노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여자아이들은 억울함을 말로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는 소리로, 누군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는 행동으로, 또 누군가는 “어차피 재미없어”라며 핑계를 대는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 모든 표현은, 아직 감정의 이름을 잘 모르는 아이들의 언어일 뿐이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그렇게 화가 났구나. 지는 게 진짜 싫었구나. 넌 그만큼 이기고 싶었구나.” 그 말 한마디가, 감정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비난보다 공감이 먼저 오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상대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3학년 교실은 누구나 주목받고 싶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으며, 인정받고 싶은 마음들이 오고 가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경쟁과 비교, 질투와 억울함이 얽혀 있는 그 작은 세계 안에서, 아이들은 서툰 감정을 하나씩 배우고 이름 짓는다. 그들의 분노는 단순한 승패의 감정이 아니라, ‘나를 봐줘, 나를 인정해 줘’라는 절실한 욕망의 다른 얼굴이다.
교사는 그 작은 사회의 중재자이자 가장 가까운 감정 번역가다.
이기고 싶은 마음,
지고 싶지 않은 마음,
억울하고 속상한 마음.
그 모든 욕망은 결국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걸 누군가 알아봐 줬으면’ 하는 간절함에서 출발한다.
남자와 여자라는 구도,
경쟁과 비교라는 틀을 넘어서
아이들이 스스로 감정을 말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작은 사회의 아이들 곁에서
그들의 감정 연습장을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