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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토리(Herstory)>

윤석남 작가에게서 배우는 삶과 예술의 길

by 두유진

어떤 사람의 삶은 한 권의 두꺼운 역사책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윤석남 작가의 삶이 그렇다. 그는 40세라는,이미 인생의 중턱에 다다른 시점에서 붓을 들었다. 주부로, 며느리로, 어머니로 살아온 시간 이후, 비로소 자기만의 방을 얻었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릴 거야.” 그 다짐은 허투루 한 말이 아니었다. 그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한결같이 예술을 통해 자신과 세상에 말을 걸어왔다.


윤석남의 길은 단순히 화가 한 사람의 도전사가 아니다. 그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불린다. 젊은 시절 미술을 배우지 못했지만, 마흔에 다시 시작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용기 있는 선언이었다. 더구나 1980년대는 여성의 목소리가 사회에서, 특히 미술계에서 크게 환영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어머니의 삶, 시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역사 속 이름조차 남지 않은 여성들을 나무와 물감으로 불러내어 세상에 다시 세웠다. 그렇게 그는 역사가 아닌 ‘허스토리(Herstory)’를 쓰고자 했다.


그의 작업 방식도 남달랐다. 버려진 나무 조각을 주워 이어붙이고 다듬어 여성상을 만들었다. 낡고 상처 난 나무들이 그의 손을 거쳐 한 명의 어머니, 한 명의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무의 결과 색이 곧 삶의 주름이 되었고, 조각된 여성상은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딸로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저마다의 어머니를 떠올렸고, 자신의 삶을 투영했다. 예술이란 결국 관람자 각자가 자기 이야기를 발견할 때 완성된다는 것을, 윤석남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깊이 흔드는 것은 그의 유기견·유기묘 설치미술이다. 1,025마리의 개 조각으로 만든 대작은 인간의 변덕으로 버려진 생명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굿 같았다. 하나하나 다른 표정과 몸짓을 가진 나무 개들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버려진 존재들이 남긴 상처이자, 여전히 우리 곁에서 들려오는 침묵의 외침이었다. 윤석남은 그 앞에서 ‘자식만 아는 모성’을 넘어선, 모든 생명을 품는 모성의 가치를 말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멈추게 된다. 예술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결국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온전히 표현될 때 비로소 예술이 되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80이 넘은 나이에도 윤석남은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76명의 초상을 그려냈다. 유관순 이외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이들의 얼굴을 캔버스에 불러내어, 역사의 앞면에 세운 것이다. 그는 수백 년간 기록된 초상화 속에 여성의 얼굴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늦은 나이에 또 다른 과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말한다. “너무 재미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소녀 같다. 나이를 넘어선 순수한 열정, 그것이 그를 여전히 작가로 살아 있게 하는 힘일 것이다.


나는 윤석남의 삶을 따라가며, 내 안에서도 어떤 친밀감을 발견한다. 나 또한 늦게 미술을 시작했고, 여성으로서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붓을 든 사람이다. 때로는 뒤처졌다는 생각에 흔들리고, 때로는 ‘지금 시작해도 괜찮을까’ 하는 두려움에 발목 잡히곤 한다. 하지만 윤석남은 보여준다. 시작은 언제든 늦지 않다고.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일이라고.


그녀의 예술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꾸준히 이어져 온 삶의 기록이다.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여성으로서의 연대, 버려진 생명들을 향한 애도의 마음까지. 그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와 떨림이 고스란히 담긴 허스토리였다. 나는 이 허스토리를 따라 걸으며, 내 나름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늦게 시작했어도 괜찮다. 예술은 결국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세상에 남기는 일이니까.


윤석남이 남긴 가장 큰 가르침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삶을 바꾸는 또 하나의 언어다.” 붓과 나무와 빛으로 써 내려간 그녀의 이야기는 이제 내게도 건네진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 손에 쥔 작은 붓으로 나만의 허스토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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