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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순간을 붙잡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박지영 작가와 묘한 울림

by 두유진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존재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어떤 장면을 남기고 싶은가 하는 질문은 늘 내 안에 머문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며 가장 소중히 붙잡고 싶은 것은, 사실 특별한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순간들, 너무 소박하고 일상적이라 쉽게 놓쳐버릴 수 있는 그 장면들이다. 늦은 오후, 창가에 앉아 바라본 나무 사이로 쏟아지던 금빛 햇살. 석양을 바라보며 마신 한 잔의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던 감촉. 친구와 와인을 부딪힐 때 순간 울려 퍼지는 청아한 소리. 그런 찰나의 순간들이 내 마음을 오래 머무르게 하고, 나는 그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화폭 앞에 선다.


최근 나는 박지영 작가의 작품을 보며 묘한 울림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풍경을 “그저 평범한 장면”이라고 표현했지만, 바로 그 평범함 속에서 나는 찬란함을 느꼈다. 복잡한 현대미술의 개념과 이론을 거두어내고, 다시 기본으로 돌아간 듯한 풍경. 보는 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장면. 그것은 내 삶 속에서 소박하게 빛나던 순간들과 겹쳐졌다.


그녀의 작품은 거창한 선언이 없었다. 특별한 기법이나 파격적인 형식으로 시선을 끌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담백함이 오히려 내 마음을 깊이 흔들었다. 왜냐하면 그림 속에는 ‘살아 있음’ 그 자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품을 보며 각자의 기억 속 풍경을 불러낸다. 나 역시도 그림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 여름날의 오후, 흙냄새와 풀벌레 소리, 바람이 흔들던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던 빛줄기를 떠올렸다. 그렇게 평범한 풍경이 나의 삶과 맞닿으며, 그림은 나를 위로하고 공감하게 한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 잠시 머무는 동안, 나는 찬란했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다. 그것은 거대한 성공이나 눈부신 성취가 아니라, 일상의 결 안에 숨어 있는 순간들이다. 사람들은 흔히 “별일 없었다”라고 하루를 정리하지만, 사실 그 별일 없는 순간 속에 가장 빛나는 장면이 숨어 있다. 박지영 작가가 평범한 풍경을 통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듯, 나 역시 나의 그림 속에 ‘삶의 사소한 순간이 가진 찬란함’을 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림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기억을 보존하는 그릇이다. 시간이 흘러 잊힐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붙잡아 두는 방법. 언어로는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감각을 색과 선으로 기록하는 방식. 나는 그림을 통해 나를 살아 있게 한 순간들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석양을 보며 마신 맥주 한 잔은 단순히 음료의 기억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하루를 살아낸 뿌듯함, 저녁 하늘의 붉은빛과 함께 찾아온 안도감, 그리고 나와 함께 그 순간을 나눈 사람들의 얼굴까지 모두 담겨 있다. 와인을 부딪히며 들었던 소리는 그날의 대화, 웃음, 온기를 함께 기억하게 한다. 나무 사이로 스며들던 햇빛은 오늘을 버티게 해 준 위로였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며, 그 빛과 소리를 다시 불러낸다.


박지영 작가의 예술관이 내 마음과 맞닿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관객들에게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이 각자의 ‘평범하지만 찬란한 순간’을 떠올리도록 이끈다. 나는 내 그림을 통해서도 같은 일을 하고 싶다. 나의 작업이 누군가에게 “아, 나도 저런 순간을 기억해”라는 말로 이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결국 우리가 예술 앞에서 울고 웃는 이유는, 작품이 거창해서가 아니라 내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린 장면이 누군가에게 그들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면, 그 순간 그림은 살아 있는 언어가 된다.


나는 이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지만, 내 그림은 내가 사랑한 순간들을 대신 기억해 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내 그림 앞에서 자신만의 찬란한 순간을 떠올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찰나의 빛, 소박한 풍경의 찬란함. 그것을 기억하고 싶어 나는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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