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발견한 인간의 평화
관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한 시아버님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그 작은 얼굴, 작은 몸..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빠져나감’으로 끝나는 것이구나,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감각을 보았다.
육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안에 머물던 영혼만이 이미 먼 길을 떠난 듯했다.
얼마 전까지 숨을 쉬고, 말을 걸고, 눈을 깜박이던 존재가 이제는 완전히 ‘고요’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묘한 경외를 느꼈다.
인간의 한평생이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삶은 뜨겁고, 죽음은 차갑다.
하지만 그 차가움이 무섭지 않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그 얼굴에는 어떤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오랜 세월의 고집과 원망, 미련이 모두 빠져나간 ‘순수한 평화’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생각했다.
인간은 아마도 이 평화를 배우기 위해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끝없이 채우려 하고, 지키려 하고, 버티려 하지만
결국 삶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비워진 자리에서야 진짜 평화를 마주하게 된다.
그날, 문득 시아버님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체면과 책임을 위해, 늘 고군분투하셨던 분.
삶의 한가운데서 늘 ‘해야만 하는 일’에 묶여 계셨던 분.
그 영혼이 떠난 자리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 치열했던 생도 결국은 ‘한 줌의 육체’ 속에 담긴 짧은 꿈이었구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누군가는 하늘로, 누군가는 바람으로,
혹은 남은 이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끝’이라 부르기보다, 또 다른 형태의 존재라고 부르고 싶었다.
아버님을 보내드리고 삶의 무게가 조금 달리 느껴졌다.
매일이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넘쳐나지만
문득문득 “이 순간도 언젠가는 빠져나갈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잠시 멈춰 서게 된다.
그때마다 마음 한편에 조용한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은 슬픔이 아니라, 존재의 여백이다.
삶이란 결국 유한함을 자각할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것이니까.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끝’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아버님의 마지막 얼굴을 본 나는
매일의 일상이 얼마나 덧없고, 동시에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낀다.
부드러운 햇살, 따뜻한 차 한 잔,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
그 모든 것이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 귀해진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그 유한함이 있기에 우리는 매 순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는 거울 같은 것이다.
고요히 잠든 얼굴 앞에서 나는 기도했다.
이번 생에서 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다음 생에서 꼭 이루시길,
그 마음이 너무 애잔해 눈물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혹시 ‘이루지 못함’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라면,
그 미완의 상태로도 평화로워질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짜 삶의 완성일지도 모른다고.
삶은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흔적과 관계 속에 남는다.
사람이 떠난 뒤에도 그의 온기와 말, 눈빛은 남아
또 다른 존재의 삶 속에서 이어진다.
어쩌면 영혼은 그런 식으로 계속 순환하며,
각자의 배움을 이어가는지도 모른다.
시아버님을 보내드리고 난..
삶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존재를 느끼는 시간으로.
죽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평화로운 얼굴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이미 충분하다.”
삶과 죽음은 결코 멀리 떨어진 두 세계가 아니다.
그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빛나고, 삶이 있기에 죽음은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그 길 위에서 매일 조금씩 더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시아버님이 남긴 마지막 가르침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삶의 끝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가 있다.”
그 평화를 닮은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도 삶의 복잡한 무게 속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조용히 되뇐다.
어제 시아버님과의 이별은 내게 슬픔이 아니라 깨달음의 문이었다.
삶은 언젠가 끝나지만, 그 끝이 바로 평화의 시작이다.
언젠가 나도 그 평화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살아 있는 이 순간을 다만 사랑하자.
그리고 오늘도 살아내느라 애썼다. 우리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