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것
짧은 만큼 더 애틋한 가을
적어도 예전의 가을은 황금빛으로 물든 세상을 한참 바라볼 여유가 있었다. 그 ‘시간’이란,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대자연이 허락해 준 짧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짧은 가을은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짧은 행복일수록 찰나의 순간으로 마음에 스며들어 오래 빛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머물러줘.” 아쉬움이 클수록 붙잡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하지만 행복은 지속 가능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다.
행복을 오래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그때의 행복한 마음을 기억해 꺼내어보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행복의 방식이다.
감나무집을 다시 꺼내 보다
10월, 가을이다. 추석 명절을 맞아 남편과 함께 귀농하신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작년에는 2시간 거리의 길을 5시간이나 걸려 도착했기에, 이번엔 새벽 12시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눈치게임에 성공한 걸까. 우리는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1시간 40분 만에 도착했다. 귀농하신 부모님께서는 최근 시설하우스를 지으시면서 기존에 살고 계시던 과수원 딸린 집에서 시설하우스 속 새로운 거처를 지어 살고 계신다. 그래서 기존 집은 빈집이 되었고, 자식들이나 손님이 오면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해놨다던 엄마의 말을 믿고 남편과 나는 감나무 시골집에 들어갔다. 아무리 청소를 깨끗하게 해 놨다고 해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시골집 특유의 쾌쾌한 냄새와 벌레들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어 누워서 잠을 청하려던 순간이었다. 이불에서 곰팡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애꿎은 남편에게 투정을 부렸다. "이불에서 곰팡이 냄새 나서 더 이상 못 덮고 자겠어." 짐가방에서 챙겨 온 여벌 옷을 꺼내어 몸을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몸살 난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불편한 잠자리 때문인지 짜증이 확 밀려왔다. 시골집이라는 공간 자체가 싫어질 만큼 말이다. 푹신한 침대도 없고, 이불은 냄새나고, 거리도 멀고 온갖 부정적인 사유들만 늘어놓으면서 투털 됐다.
답답한 마음에 부모님께도 잠자리가 불편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빠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따졌다고 그래?"라고 하셨다. 순간 방금 전 내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아빠의 표정 속에서 감나무집의 지난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시골집 감나무집은 추억이 참 많다. 10년 전 귀농을 하셨을 때다. 20대인 나도 금요일 퇴근길이면 자주 부모님을 뵈러 내려갔었다. 마당에 풀어놓고 자유롭게 키우는 작은 강아지 '이쁜이'도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봄이면 화려하게 피어 있던 마당의 꽃들, 여름엔 더운 날씨에도 만두가 먹고 싶다던 딸을 위해서 다 같이 만두를 빚어 만들어 먹었고, 가을엔 나무에서 직접 따먹던 왕대추, 겨울엔 부모님과 함께 김장을 했다. 나에겐 감나무집이란 이렇게나 추억이 많이 깃든 공간이다. 그런데 고작 잠자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모든 시간을 부정해 버릴 뻔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이쁜이'도 하늘나라에 간 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그때의 따듯한 온기와 웃음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현재의 불편함에 묻혀 과거의 행복을 잠시 망각했던 나였다. 하지만 감나무집을 마음속에서 꺼내보니 그때의 바람과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속 가능한 행복이 없다면, 마음속 작은 상영관에 앉아 지난가을의 장면을 꺼내보면 어떨까. 그때의 공기, 그 기억만으로도 다시 행복해진다. 결국 행복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것이다. 짧은 가을의 한 장면처럼, 내 마음속에 저장된 행복을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