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미안해 하는 이유
"OOO 홈 서비스 고객센터입니다. 가정용 인터넷, TV, IoT, AI 등 유무선 결합 상품은 1번, 가게 및 상가…."
낯익은 음성에 지루한 안내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원하는 서비스가 나올 때까지 휴대폰 스피커로 연결해 놓은 채 하릴없이 보고 있던 창의 스크롤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휴대폰 관련 서비스가 나오자마자 해당 번호를 잽싸게 눌렀지만, 종착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몇 번의 지루함을 더 견뎌야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고객 응대 근로자 보호조치 시행 중이오니 배려하는 마음으로 상담 부탁드립니다."
드디어 연결됐다...! 건너편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 고객님만의 OOO, 본사 VIP팀의 OOO 상담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네, 안녕하세요? 저 OOO 서비스 이용하고 있는데요. 약정기간이 만료되서 해지 신청하려고 전화드렸어요.
- 아 그러세요, 고객님. 잠시 조회해보고 상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OOO 고객님 맞으시죠?
- 네, 맞아요.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구름처럼 가볍고 나긋나긋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음성의 높낮이가 스타카토 찍듯 분명하였다.
조회를 얼마나 하는 것일까, 암실같은 적막감이 이어졌다.
- 네, 고객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인터넷 같은 경우에는 최근에 약정이 만료가 되신 것으로 조회가 되고 있으시고요. 제가 해지와 재약정을 모두 담당하고 있는 부분이라서요. 혹시 이용하시면서 불편한 점이 있으셨던 걸까요?
상담사는 친절과 예의의 표시로 지나치게 말끝마다 '시'를 붙이고 있었다.
- 아, 그런 건 아니고요. 약정 기간이 만료돼서 해지하고 변경하려고 하고 있거든요.
- 어... 계약하신 분 요금할인하고 지원금 둘 다 나오는 건 알고 있으시죠, 고객님.
- ...네. 근데 저희 다른 거 설치하고 기계도 다 있어서 지금 해지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말이 늘어지기 전에 이미 설치를 끝냈다며 수를 던졌다.
물론, 순진했지만.
- 아... 그래요? 해당 상품이 원래라면 O만 O 천 O 백 원이었고, 저희가 이제 재약정되는 기준으로 재조회를 했을 때 부가세 포함해가지고 O만 O 천 O 백 원까지 금액이 떨어지고요.
- 아... 네, 네.
- 저희가... 지원금이 OO 만원까지가 나오거든요, 고객님?
어느덧 상담사의 스타카토는 사라지고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설득하려는 자와 설득당하지 않으려는 자... 문득 그 팽팽한 전운이 감지되면서, 덩달아 나의 말투도 확고해졌다.
- 아예, 예... 저희가 그거 다 확인하고, 감안하고 지금 연락드리는 거라서 지금 해지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아, 그렇습니까? 저희 부서랑 통화하신 게 처음이라 제가 여쭤봤는데 지금 이 혜택을 안내받으셨다고요, 고객님?
속도는 알레그로(빠르게)에서 프레스토(빠르고 성급하게)로, 다급함이 느껴지는 '고객님?'으로 마무리됐다. 마무리라고 하지만 절대 마무리가 아닌 마무리.
- 아... 그건 저희가 알고 있던 내용이라서요, 그래서 여기저기 비교해 보고 다른데에서 설치를 다 해서요.
- 어? 제가 제시한 O만 O 천 O 백 원보다 더 저렴한 데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빨리 끊고자 대강 둘러댔더니 멀리 있던 화살이 눈앞까지 날아와 어수룩하고 빈약한 내 논리를 쏜다.
기다렸다는 듯이, 요놈 잡았다는 듯이.
- 아…. 아, 그건 아니고. 그건 아니고요. 저희 다 설치, 그 설치를 해놔서요. 지금 해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 뭐 잘못했나? 왜 이리 땀이 나는가. 왜 말끝이 흐려지는가. 왜 당당하지를 못하는가, 내 거 내가 해지하겠다는데.
주고받는 대화 그 초속의 마디에도 보이지 않는 삭막한 긴장감이 계속되었다.
- 다음 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