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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타 May 23. 2024

일상에서 만나는 그리움

홍시에 얽힌 사연


기억은 때때로 사진 한 장, 특별한 물건, 익숙한 장소, 낯익은 음악 등에 의해 소환되곤 한다.

이는 타인과 나눴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의 도구다.

그를 접하는 순간, 어느새 우리를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사랑했던 이들과 얽히고설킨 그 시간 속으로 말이다.     


내게도 느닷없이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아련한 마음을 솟구치게 하는 음식이 있는데 바로 푹 익은 감, ‘홍시’이다.

짙은 주홍빛에 반으로 쪼개면 몰캉몰캉한 과육이 쭈욱 드러나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달콤함이 느껴지는 그 과일 말이다.     




할매는 내게 얼굴에 주름이 많고, 욕을 잘하고, 생활력이 무진장 강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그 없던 시절에 끈질기게 살아내기 위해서 독기를 무기처럼 장착하고 다녔던 사람.     


이를 증명하듯이 할매에게 깊은 고랑 같은 주름과, 거친 욕과, 끈질긴 생활력이라는 생존 무기가 온몸에 배어있었다.

젊어서부터 시원치 않았던 이도 나이가 갈수록 하나둘씩 사라졌다.

내가 어려서 봤던 할매의 치아는 이미 부실했는데, 그 부실한 이를 가진 입으로 욕도 하고, 간도 보고, 밥을 먹곤 하였다.

어린 내 눈에 그녀는 호호 할머니처럼 인정 많고 따스한 인물은 아닌 것으로 기억됐다.     


그런 할매가 제일 좋아했던 음식은 말랑하고, 부드럽고, 다디단 홍시.

하나만 먹어도 배가 든든한 이유도 한몫한다.

장에 가면 꼭 몇 개씩 손에 들려오는 홍시는, 할매 스스로를 지탱하게 하는 밥이자 목숨과 같았다.     


장에서 사 온 감을 반으로 쪼개 내게 내밀고, 할매는 곧 달콤하고 탱글탱글한 과육을 재빨리 입에 넣고 바지런히 오물거렸다. 손에 들고 있는 감에서 미처 눈을 떼지 못한 채.

오목한 입 주위의 주름이 눈에 띄게 자주 짧아졌다가 길어졌다.

내게는 말이 별로 없었지만, 흐뭇한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열심히 챙기던 할매는 병마와 싸우며 힘들게 삶을 살아갔다.

자식들과 친척들이 준 용돈은 하나도 쓰지 않고 고이 장롱에 모셔놓고서.     






어느 날 갑자기 할매는 아버지를 부르더니 장롱에 숨겨져 있던 낡은 찬송가에서 차곡히 모아놓은 백만 원을 건넸다.

‘나는 이것이 그다지 필요가 없으니, 네 살림에 보태 써라’, 라는 말과 함께.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한 그녀는, 그렇게 좋아했던 홍시를 짧게 맛본 뒤 이튿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목숨과 같았던 홍시는 그렇게 할매의 저승길까지 따라가 그녀를 위로했다. 가는 길이 너무 고달프고, 배고파서 쓰러지지 말라고. 조심히 잘 건너가라고.


이후로 내게 감은 홍시든, 땡감이든, 곶감이든 할매를 자동으로 떠올리게 하는 눈물 버튼이 되었다.     




'야, 이년아, 나 죽고 나서 감 보면 내 생각이 날 거다.'     


할매와 나, 머리를 맞대고 감을 먹으며 투덕거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어릴 적 짓궂은 친구들에게 놀림당하고 허탈하게 집에 돌아올 때면, 할매는 몽둥이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우리 손녀 울린 놈 나오라’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대찬 목소리가 허름한 치아 사이로 울려 퍼졌다.

한바탕 소탕 작전을 펼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분을 히며 그 허름한 치아로 우물우물 감을 먹었다.     


이렇듯 감은 내게 아킬레스건과 같다.

미처 할매의 마음도 모르면서 그저 매섭고 정 없는 사람으로 기억한 것, 하늘로 가기 전날 함께 있지 못한 것,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매번 그녀를 모신 곳에 찾아가 감을 올려놓고 빌어보지만, 어찌 나의 옹졸함이 씻길까.

아무리 참회를 해봐도 마음이 무겁다.     


그리움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애달픔이, 눈만 돌리면 만날 수 있는 보통의 음식이라 더욱 깊게 사무친다. 사진 속의 할매는 항상 처연하게 우릴 바라보고 있다. 정리되지 않은 주름진 입에 처연한 미소를 띠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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