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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타 Mar 25. 2023

오후 4시의 존재감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대는


L은 몸집이 아담하고 예뻤다.

큰 눈망울에 천사의 실수라 불리는 보조개를,

그것도 흔치 않게 양쪽 광대 밑 볼에 가졌다.

그것은 마치 깊은 웅덩이를 연상시켰다.


배우 '이하늬'나 모델 '미란다 커'를 떠올리게 하는

일명 베이비 페이스의 소유자 L은

성격까지 사려 깊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첫 학년, 첫 수업에 괜히 자리를 잘못 잡은 탓에

그녀와 '베프'가 돼버린 나는

그녀 곁에서 오징어나 주꾸미 등

해산물이 된 듯한 느낌으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자신이 예쁜 것을 알지만 굳이 예쁜 척을 하지 않는다.

확실히 '공주과'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냥 공주이지, 엄지공주.


붉은색 립스틱을 소장하고 다니며

지워지기 전에 얼른 덧칠하고

TPO에 맞는 옷차림과 헤어,

수줍은 미소를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녔다.


그에 비하면 나는 선머슴이었다.

대충 묶은 머리에 편한 복장과 운동화,

다소 낮은 톤의 목소리.


발표라도 하는 날은 거의 다나까체를 일삼으며

딱딱함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전투적인 자세로

명료 전달했지만,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성스러움보다 막걸리와 소주를 털어 넣는

공대생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녀는 달랐다.

매번 실수를 수줍은 듯 애교로 넘기는 것이

밉지 않게 사랑스러웠다.

야행성이라는 L은 심지어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것조차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내가 L을 유일하게 이기는 방법은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하나라도 더 공부해서

시험 점수를 잘 받는 것.

나는 호수 같은 눈망울도,

천사의 실수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진짜'를 채우는 것이

아니었음을 이내 깨닫는다.






- 나는 오후 4시가 싫어.


길을 걷다 L이 말한다.

오후 4시.

4시 정도면 한여름 빼고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곧 다가올 저녁을 알리는 시간대다.


- 왜?

- 그냥 이 분위기가 별로야.

  해가 넘어가는 듯한 이 기분이 싫고,

  빛이 또렷하지 않은 것이 싫어.

  사방이 흐리멍덩한 노란빛이라고 해야 하나.



대충 이런 느낌, 오후 4시 노란빛이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오래된 앨범에 끼워진

빛바랜 사진과 같다.

조금 있으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을 못 할 시간이 오겠지.


- 나는 그런대로 이 분위기도 괜찮은데.

   매일 이 낡은 빛을 볼 수는 없는 거니까.






지금 이 순간, 너와 나는 몇 시에 살고 있을까?


네가 싫어하는 오후 4시일까,

아니면 아직은 햇빛 짱짱한 오후 1시쯤일까.

어느 순간, 어느 시간대에 있더라도

자신만의 시간을 살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영원히 낮 12시를 살 줄 알았던 나는,

오만과 교만이라는 가면을 벗고

오후 4시를 넘어서

지독하게 어두컴컴한 오전 2시를 지났어.

이제는 여명이란 푸르스름한 새벽을

마주할 채비를 하고 있거든.



그래서 고백하건대,

나는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 준 오후 4시를

좋아하게 되었어.

곧 꺼져가는 듯한 그 바랜 빛이

다채롭게 변하는 걸 알아버렸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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