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선 강원대 심리학과 교수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감당해야 하는 자살 유족들의 애도 과정은 특별하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한지 모른다.
자살로 인한 한 해 유가족 수가 9만 명이란다. 어마한 숫자다. EBS 다큐프라임에서 <너무 이른 작별>이라는 제목으로 자살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제목을 참 잘 지었다 싶었다. 작년 가을에는 지역 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자살유족자들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강의 요청이 들어왔는데, 나보다 더 이 분야에 전문가인 선생님들이 많았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약간의 부담으로 시작된 강의 준비가 자살 유족자들의 애도 과정이 왜 그리도 힘든지 개인적으로 한 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기에, 일부의 내용을 나누려고 한다.
요청된 강의는 자살유족자들을 이해시켜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분들은 관련 강의나 교육을 많이 받았던 분들이라고 생각되었기에 다른 강의보다 좀 더 고민이 되었다. 대개는 상대방이 고통스럽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공감적인 감정이 자연스레 올라오고 그 감정이 전달되면 당사자에게는 위로가 되면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 강의가 요청된 건 자살 유가족에게 이 공식을 뛰어넘은 뭔가 복잡한 이야기가 있다는 거라고 생각했다. 살아가면서 겪는 경험이나 사건들이 명확히 이해가 되면 타인에게 전달되는 내 모습도 이해할 만하고 적절하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경험이나 사건을 겪고 나면 행동이나 언행이 타인에게 비일관적이거나 혼란스럽게 비치기도 하고 때로는 부적절하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전달이 되기도 한다. 그 경험과 사건이 나에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 준비를 하며 놀란 사실 중 하나는 국내외 통틀어 자살 유가족들을 이해할 만한 서적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강의 제목의 요청부터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육체, 그 이상의 죽음
실제 현장에서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관찰을 통해 사회 현상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유명했던 미국의 사회학자, David Sudnow. 강의 준비를 하다 그의 저서 『Passing on: The Social Organization of Dying』를 접하게 되었다. 그중 생물학적이고 생리학적 죽음 외에 사회적 죽음과 심리학적 죽음에 대해 논의한 부분이 있었는데, 사회적 죽음은 지금의 대인관계나 사회적 활동으로부터 점점 자신의 존재를 사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앞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죽음을 준비해 가면서 사회적 관계나 활동으로부터 마음의 거리를 두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예기애도'라고 하는데,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날 경우 이는 정상적인 애도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시한부 삶을 살다 간 분들의 유족들 또한 고인을 떠나보내고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정 시간이 흘러도 이런 패턴이 계속되는 경우는 병리적 애도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인에게 의존적이었거나 그와 공생관계였거나 또는 고인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을 경우 병리적 애도 과정을 더 경험하기 쉽다.
자살 유족들의 사회적 죽음은 더 갑작스럽고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성격을 띨 수 있다. 게다가 고인의 자살 후 이어지는 죄책감, 타인으로부터의 원망, 분노의 감정 그리고 수군대는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지기가 쉽지 않은 상황 때문에 자살 유족의 사회적 죽음에 대한 대가는 훨씬 크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심리적 죽음
Sudnow 박사가 이야기한 또 다른 형태의 죽음, 심리적 죽음은 개인의 인격이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나의 죽음을 앞두고, 또는 고인의 상실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격을 어떤 형태로든 소멸시키는 것을 말한다. 경우에 따라, 고인과의 이별이 잘 처리되지 못할 경우 고인의 인격 일부를 자신의 안으로 가지고 가져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 또한 병리적 애도의 형태로 볼 수 있다. 고인을 상실했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로 남기고 싶은 병리적 소망이다. 이는 고인의 상실 후 성격이 일부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관찰될 수 있다. 이들이 고인을 놓칠 수 없는 이유, 그건 바로 준비되지 못한 느닷없이 닥친 때 이른 죽음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준비되지 않았던 이별
현실에서 준비가 된 이별이 얼마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준비된 이별은 준비되지 않은 이별과 상당히 다른 반응이 뒤따른다. 멜라니 클라인의 대상관계 이론에서는 사람이 태어나 경험하게 되는 가장 첫 이별은 엄마의 젖가슴이라고 언급되곤 한다. 이유식을 시작할 때쯤 엄마 젖가슴과의 이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이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장하면서 죽을 때까지 매번 고통스럽기만 한 이별을 여러 번 만나게 되는데, 피하려고 해도 피하기 어렵다. 곧이어 다음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와 공생 관계로 지내던 엄마의 외출이 시작된다. 엄마는 친청 엄마나 아는 분에게 아이를 처음 맡기고 외출을 하게 되는데, 이게 아마 두 번째 이별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이별은 엄마의 일부인 젖가슴이 아니라 엄마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인데, 점정 강도가 세진다.
어릴 때 할머니와 같이 살았던 집에 고모 세 분이 돌아가며 갓 젖을 뗀 고종사촌을 할머니한테 맡기러 온 것을 자주 보면서 자랐다. 그때마다 할머니와 고모가 주고받던 장면이 있다. “내가 엎고 있을 테니 안 볼 때 얼른 가면 된다.” 몰래 도망치듯 나가던 고모가 불쑥 고개 돌리던 사촌에게 들킬 때가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엄마가 서둘러 나가던 장면을 눈치챈 사촌은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기가 봐도 엄마는 도망가는 자세고 평상시와 너무 낯선 엄마의 모습이기에 영영 이별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있다. 다시 꼭 돌아온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주거나 뭔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몸짓이라도 해 줬으면 덜 패닉해질텐데....어찌 이럴 수가 있는지.... 원통하고 서럽다.
아이에게 엄마와의 이별을 미리 알려주느냐 아니냐에 따라 상당히 다른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아이가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상관없이 말이다. 아이에게 엄마가 곧 어딘가 외출할 거고, 그렇지만 곧 돌아온다고 말하는 거, 더 구체적으로 할머니랑 밥 먹고 놀다가 보면 엄마가 돌아온다고 말해주는 거, 그리고 정확히 그 시간대에 엄마가 나타나는 거, 이렇게 미리 아이에게 엄마와의 분리와 재회를 알려주는 것은 아이가 엄마와의 이별의 고통을 참을만한 일로 여기고 엄마와의 분리를 현실로 받아들이는데 그래서 좀 더 정상적인 정서 반응을 학습하는데, 그리고 타인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엄마가 아이의 고통이 못내 안쓰럽고 그 고통을 목격하는 걸 피하고자 아이가 한눈파는 사이 몰래 도망을 가게 되면 엄마의 자리 뜸은 아이에게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는 불안과 달리 생존과 관련한 불확실한 상황에서 보일 수 있는 정서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은 순간부터 분리와 이별을 경험하는 게 성장해 가는 또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라고 하지만, 준비된 이별과 준비되지 않은 이별의 고통 정도는 어마한 차이고 반응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자살 유가족들의 이별을 설명하기 위해 참 길게 설명을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이별을 연습해 왔음에도 이별은 매번 힘들다.
자살 유가족들이 경험하는 이별은 더 힘들다. '뒤통수 맞았다'라고 표현할 때의 강도보다 훨씬 더 세지 않을까 싶다. 아무런 준비도 못 하게 해 놓고 고인은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사라진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상태. 그렇게 혼자 홀연히 사라진 거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감정인들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존 볼비(J. Bowlby)는 갑작스러운 분리와 관련해 성인에게서 관찰되는 첫 번째 반응을 얼어붙은 듯한 상태, 무감각이라고 했다. 일종의 응급처치 반응이 아닐까 싶다. 무감각은 즉각적인 고통 감을 잠시 지연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주간 지속될 수 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응급처치가 끝나고 나면 상실이 서서히 현실로 드러나는데 이 즈음부터 처한 상황에 따라 또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 모든 유족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반응과 그리고 달리 나타나는 반응이 제 순서로 나오기하고 또는 순서를 달리하여 나오기도 한다.
무감각한 반응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나면 고인에 대한 갈망이 극대화될 수 있는데, 이는 길에 보이는 사람이 고인이라고 착각하게 되거나, 고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 올 거 같은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 고인을 다시 되찾고 싶어서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반응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1년까지 지속될 수 있는 반응이라고 한다.
분노
이 단계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서적 반응(분노, 죄책감, 원망감, 두려움, 불안, 우울 등)도 나타날 수 있는데, 이 중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반응이 분노와 죄책감이라고 한다. 강의를 들었던 센터 직원분들 중 분노 반응이 정말 난감하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분노감을 먼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유족들의 분노가 어떤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자살 유가족들이 주변인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날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 “왜” 그런 선택밖에 할 수 없었는지, “왜” 혼자 결정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미스터리 한 상태로 나를 남겨놓고 말 한마디 없이 고인은 사라져 버렸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도, 다시 딱 한 번만 만나고 싶어도, 내 제안은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다. 실은 고인에게 소리 높여 화도 낼 수 없게 만든 상황인 거다. 게다가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죄책감이 아직 해결되지 못했을 가능성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고인에게 화내는 게 어려울 수 있다.
기저에는 통제 불가능한 무기력감이 깊이 자리 잡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고인에게 낼 수 없는 화를, 의식화하기도 어려운 고인에 대한 그 화를, 고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며 이 상황을 통제해보려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화내기 가장 쉬운 상대는 고인을 잘 돌보던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배우자이거나 아이의 양육자이거나 또는 고인을 관리하던 정신건강 종사자일 가능성이 크다. 도무지 이유가 없는, 이해되지 않는 죽음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나타나야 고인의 죽음에 이유도 있고, 이해도 되는 것이다.
이해될 수 없는 죽음
나이가 지긋이 드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또는 말기 암 선고를 받은 분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는 분노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는다. 죽음에 명백한 이유도 있고 상황이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자살 유가족들에게 고인의 죽음은 도무지 죽을 이유가 없고 너무 때 이른 죽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나고 누군가가 잘못해서, 고인을 잘 돌보지 못해, 죽은 것이라고 명백한 이유라도 찾고 싶은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알고 있던 고인이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할 리가 없다고 믿고 싶고 고인을 보호하고 싶어서, 화를 낼 살아 있는 대상이 정말 필요한 것이다. 화나는 대상이 지금 없다는 것을 현실로 깨달을 때까지, 상실이 일어난 현실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 화 날 수 있을 것이다. 화나는 그 강도만큼 화를 받는 사람에게도 그 강도가 고스란히 전달해져 참 괴롭고 힘들다. 잠시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면 그 화는 실제 나에 대한 화라기보다는 고인에 대한 화 일수도 있고, 현재 벌어진 상황에 대한 화 일수도 있고, 고인의 죽음을 알아채지 못했던 나의 죄책감에 대한 화 일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감정일 수도 있다. 그걸 내가 한꺼번에 받으니 얼마나 힘든지.
분노는 죄책감과 함께 애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언제라도 한 번은 표현될 수 있고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게 닥친 상실을 진정한 상실로 받아들이고 고인과 작별할 수 있으며 고인이 떠난 나의 새로운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젖가슴과 이별하는 순간부터 수많은 상실과 이별이 있었다. 상실에 대한 애도 과정에서 미치도록 화가 나기도 하고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슬퍼서 울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여기까지 잘 왔고 그 세월을 사는 동안 상실에 대해 애도하는 법을 내 몸 어딘가는 분명 기억하고 있다. 상실 후 새로운 다른 좋은 것들이 나에게 있어 왔다는 것을 힘들겠지만 기억했으면 한다. mind
<참고문헌>
Sudnow, D (1967). Passing on: The social organization of dying. Englewood Cliffs, NS; Prentice-Hall.
Freeman, S. (2005). Grief and Loss. Understanding the Journey Cengage Learning
이동훈, 강영신 (2019). 애도상담. 사회평론 아카데미.
이종선 강원대 심리학과 교수 | 임상심리 Ph.D.
임상심리학자로 강원대 심리학과에 재직중이다. 영국 King’s College London, Institute of Psychiatry, Psychology & Neuroscience에서 컴퓨터 기반 인지편향수정 프로그램 효과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우울, 불안 및 외상 관련 실험 기반 심리치료 프로그램의 효과 검증 연구를 진행중이다. 한국임상심리학회 편집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총무이사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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