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탈무드에 "돈이 있으면 근심이 많고, 돈이 없으면 근심이 더 많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통찰은 정신건강 영역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간과해서 안될 것은 자신의 경제적 상태를 낮게 지각하는 것 자체가 정신질환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의 허구
1998년 영국 런던정경대(LSE)의 로버트 우스터 교수가 본인의 조사를 토대로 방글라데시, 아제르바이잔, 나이지리아를 각각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1, 2, 3위에 랭크시키면서,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과 언론들은 일제히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쏟아냈고 그 나라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조사 결과에 대해 비난을 쏟아내었습니다. 여전히 이들 나라에 대한 조사 결과는 많은 계도적 설교에 사용됩니다. '우리의 행복에 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의 정신건강이나 안녕감과 관련하여 ‘돈이 다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연구는 계속해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극단적인 결과를 접한 많은 연구자들은 조사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의심은 꽤나 합리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방글라데시를 1위로 산출한 인간 행복지수에는 경제적 수준이 아예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흡연율, 약물 사용률, 자살률 등을 토대로 산출한 지표였지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살하지 않는다고 행복한 나라는 아니잖습니까!).
더욱이 연구 참여자의 편향된 모집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습니다. 해당 연구에 참여하였던 저소득국가의 응답자들은 대부분 사회경제적 상태가 비교적 높은,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젊은 성인들이었기에 이들이 다른 나라의 일반적인 연구 참여자들에 비해 불안이나 우울을 덜 느낄 이유는 수백 가지나 되고도 남았던 것입니다.
돈이 기울면 마음건강도 기운다
개인의 행복감에 미치는 사회경제적 자원의 영향력을 추적하는 개념이 '사회경제적 기울기'(socioeconomic gradients)입니다. 개인의 수입 + 교육 연한 + 직업 + 주거의 안정성 등을 고려한 '사회경제적 상태'(Socioeconomic status, SES)가 낮을수록, 개인의 신체적 건강ㆍ정신적 건강이 나빠지는 상관관계를 말합니다.
이와 관련한 수많은 연구결과들은 사실 많은 심리학자들에게 마주하기 고통스러운 기록들입니다. 사회경제적 상황이 열악할수록 정신질환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나마 중산층과 고소득층 사이에서 정신질환 발생 빈도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겠으나, 중산층과 저소득층 간은 발병 위험성의 차이가 특히 큽니다.
사회경제적 상태가 가장 낮은 그룹은 가장 높은 그룹에 비해 정신질환이 2~3배 더 높게 발생합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전자가 후자에 비해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할 가능성이 4배 정도 높습니다. 그 차이는 성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청소년에게서도 반복하여 검증되고 있습니다.
낭만적 가난은 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선한 인물의 입지전이 배경으로 소비되는 드라마의 가난은 지나치게, 정말 지칠 정도로 지나치게, 낭만적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막중한 무게를 가볍게 휘발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가난이란 낭만적으로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환경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배경도 아닙니다. 그저 불확실하고 모호한 갈등 속에서 마냥 우두커니 버티어 내야만 하는 조건입니다. 아동기 시절부터 극도의 고통에 휩싸여 주양육자에게 발신하는 요청은 대부분 공허하게 사라지고, 어쩌다 돌아오는 응답조차 터무니없이 불충분하거나 불공평하다는 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개인의 결정권과 통제감이 박탈되는 경험이 하나 둘 누적되면서 스트레스에 맞설 수 있는 개인의 인지적, 정서적 자원에는 한계가 생겨납니다. 또한 현재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 및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인적 자원이나 시스템, 혹은 장기전을 가능케 하는 경제적 자원 등이 부족하기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 실패하기 십상이며 현재의 고통을 적절히 감내하며 '미래를 내다보고' 스트레스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정신질환으로 이어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집니다. 먼저 가족을 비롯한 주위 환경은 나의 정신질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나의 의지를 탓하는 상황으로 전개됩니다. 초반에 나의 질환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나는 이를 수용하고 적절히 치료적 개입을 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이 질환을 '나의 것'으로 인정해달라는 항의를 하기 위해, 나의 질환을 그들에게 '입증'하기 위해, 불필요한 노력들을 시작합니다.
혹은 사회경제적 상태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교육 수준 혹은 인지적 자원이 부족하다면 치료받으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거나 치료받을 방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원까지 생각해야 할 상황이라면 경제적 자원의 결핍은 정신건강의 유지에 있어 매우 큰 위해요소가 됩니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위태로워집니다. 사회적 자산은 다양한 층위에서 결정됩니다. 국가의 소득, 지역사회의 소득, 개인의 소득 역시 사회적 자산을 결정합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구 상으로는) 소득에 따라, 사회의 지지체계와 서로에 대한 믿음 수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역사회의 실업률이 높아져 사회의 응집력ㆍ신뢰도 수준이 떨어질 경우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가 빈번해지며, 고독감이 높은 사회일수록 자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최소한의 사회 활동을 위한 경제 상태가 담보되지 못하는 경우, 그러니까 약속 장소로 이동할 교통비가 없거나 타인에게 커피 한 잔 사 줄 여유가 없다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개인의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성취의 기회나 성취의 경험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이러한 경험의 제한이 우울과 불안장애 및 자살 사고에 기여한다는 연구들이 다수이고요.
정신질환과 가난의 상관성
사회경제적 상황이 열악할 경우 정신질환의 발생 가능성이 커지는 양상은 뚜렷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의문 역시 가능합니다. 정말 가난해서 정신질환을 앓게 된 것일까. 정신질환을 앓아서 가난하게 된 것은 아닐까. 가난해서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는 입장은 '사회적 원인 이론(social causation theory)'이라 하며, 정신질환 때문에 가난해졌다는 후자의 견해는 '사회적 선택 이론(social selection theory)'이라 합니다.
먼저 ‘사회적 원인 이론’을 보면, 앞서의 이야기들과 유사하게 사회경제적 자원으로 인해 개인이 겪는 어려움에 집중합니다. 예컨대, 사회경제적 상태가 낮을 경우 이혼율은 더욱 높고 이 때문에 어린 시절 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할 가능성 또한 많아집니다. 혹은 치안이 불안정하고 윤리적 기준의 허들이 매우 낮은 슬럼에서 살다 보면 폭행ㆍ강간과 같은 불의의 사고를 당할 위험도가 커집니다. 사실 이러한 외상 경험은 (유전적 소인 다음으로 위험하게 작용하는) 주요한 정신질환의 발병 요인입니다.
2003년 사회적 원인 이론에 입각하여 수행된 한 연구는 개인의 심리사회적 환경과 관련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지역사회에 카지노가 생기면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많은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급격히 높아지고 지역 경기가 부흥하면서 해당 지역 어린이들의 정신질환 증상의 빈도가 감소한 조사연구가 발표된 것입니다. 즉 빈곤에서 벗어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지역 주민의 정신건강 문제가 완화된다는 사실을 이 연구가 드러내 보였지요.
이는 여러 임상 연구자들이 간과해 왔던 정신건강 위험요인을 다시 살피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돈은 중요하지 않아. 네 마음만 중요하다면” 따위의 정신 승리를 조장하는 대중문화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과 임상 연구자들이 불편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였습니다. 마음이 평온하기 위하여 돈은 어느 정도 선결되어야 할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사회적 선택 이론’에서는 정신질환을 원인으로, 가난을 그에 따른 결과로 봅니다. 개인에게는 유전적으로 결정된 정신질환의 소인이 과거에 존재했었고 → 이 우연한 불행이 삶의 어느 시기에 발현되는 바람에 → 교육에서 배제되거나 고정적 수입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졌으며, → 이에 따라 사회경제적 위계의 하류로 떠내려 오는 일련의 과정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개인을 붙잡아주는 안전한 환경이 여전히 부족한 현재로써는 이러한 '사회적 선택 이론'의 증거들은 점차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많은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자에 대한 낙인효과는 좀처럼 옅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계절에 따라 움직이던 과거의 사회와 다르게, 사람들은 더 이상 개인이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기능을 발달시키거나 직장을 구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정신질환 발병 이후 더 낮은 사회경제적 상태로 무력하게 밀려나게 되는 이유입니다.
한국처럼 공적 보험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나라에서도, 만성적 개입이 필요한 조현병과 같은 질환이 한 번 발병하면 그 가족의 경제적 부담은 크게 늘어납니다. 조현병과 조울증 등 재발 소지가 있는 정신병의 경우, 짧게 한 달 보통 두세 달 입원하게 되는데, 이때 비용은 ‘수 백이 깨'집니다. 회복이 더뎌 여러 차례 반복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높은 사회경제적 상태의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나 수년간 십여 차례의 입퇴원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삽시간에 경제적 위계가 두세 단계 아래로 떨어지는 경우도 드문 일은 아닙니다.
한동안 팽팽하게 맞섰던 두 이론은 현재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는 데에서 합의가 되려는 중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례에서 확인되었듯, 가난과 정신질환, 이 둘은 악순환을 되풀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했기에 발병되기 쉬웠고, 발병 이후에는 학업 중단 및 본인 실직 혹은 보호자의 실직 등으로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다만 두 관점은 정신질환의 세부 영역에 따라 특화된 강점을 드러냅니다. 가난을 원인으로 파악하는 '사회적 원인 이론'은 여러 정신질환 중 비교적 덜 심각한 형태인 불안과 같은 영역에서 설명력이 높습니다. 즉 저소득층인 까닭에 도시 외곽에 산다거나 미래 상황에 대한 염려가 많고 차별 및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에는 후천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얻게 되는 불안이 질병으로 이어집니다. 반면 '사회적 선택 이론'의 사례는 조현병, 조울병 등 심각한 정신질환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면이 있고요.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서
가난과 정신질환의 악순환 관계를 반복하여 확인하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를 당장 상쇄할 수는 없겠으나,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에서 그나마 해결의 단서를 찾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연구를 진행할 때에는 혹은 리뷰할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과연 연구에서 보고된 사회경제적 상태는 믿을만한 것일까요? 본인이 스스로의 상태를 너무 좋게, 혹은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 자체가 반영된 결과는 아닐까요? 그렇기에 최근에는 실제의 수입, 교육 수준보다는 스스로 ‘지각하는’ 혹은 ‘주관적인’ 사회경제적 상태 인식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연구들을 지속해보니 '지각된' 사회경제적 상태가 ('객관적' 사회경제적 상태와는 별개로) 개인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에서의 절대적ㆍ보편적인 위계보다는 스스로가 지각하는 위계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측면은 청소년 연구들에서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신 승리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더 높은 곳으로 상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이 지각하고 있는 사회적 위계가 실제로 그렇게까지 낮은 것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는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사회경제적 상태를 낮게 평가하게끔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전환도 분명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여러 환경적 이유들로 실제 문제가 발생한 경우 이를 가역적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연구자들은 낮은 사회경제적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개입 가능성을 타진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3세~5세 영국 영아의 경우에도 가족의 수입이 적을수록 그들이 겪는 사회적 정서 발달의 어려움은 컸습니다.
그렇지만 부모와의 정서적인 상호작용이나 원만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그러한 문제는 충분히 완화되었습니다. 즉, 생애 초기에 경험하는 가난의 문제라면 가족의 정서적 교류 혹은 사회 체제의 작동으로 정신건강 문제에 개입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사회경제적 기울기를 어느 정도 수준까지 완만하게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 학자들의 시도는 앞으로도 치열하게 계속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행복은 가난과 별개의 것
마지막으로, 많은 수입이 많은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살짝 얹고자 합니다. 적은 수입과 많은 슬픔이 상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복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가난은 불행을 말해줄 수 있지만 나의 행복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난을 벗어난 정도라면 사회경제적 조건과 행복감은 별개의 경로로 작동합니다.(Kushlev, 2015) 즉 나의 불행은 어쩌면 나의 가난에서 왔을지 모르지만, 나의 행복은 가난과 별개인 것입니다. 돈은 정신건강 측면에 있어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의 불행과 행복을 결정짓는 그 모든 요소에 낮은 사회경제적 상태를 함부로 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mind
허지원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 | 임상심리 Ph.D.
중앙대 심리학과 조교수이자 임상심리전문가. 한국임상심리학회 특임이사, 한국인지행동치료학회 홍보이사, 대한뇌기능매핑학회 대의원 및 학술위원, 한국인지과학회 총무이사. 정신병리 및 심리치료의 효과를 임상과학 및 뇌신경학적 수준에서 규명하고자 연구를 지속함.
>> 한국인을 위한 심리학 잡지, <내 삶의 심리학 mind> 온라인 사이트가 2019년 7월 8일 오픈하였습니다. 내 삶의 비밀을 밝혀줄 '심리학의 세계'가 열립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50명의 심리학자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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