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에 조직폭력배 간에 아주 잔인한 범죄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경쟁관계에 있던 조직원들을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한 범죄 었는데 결국 사람을 살해한 주범들은 법의 심판을 받아 사형이 집행되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범죄가 발생하고 마무리되는 과정을 뉴스를 통해 지켜보면서 한동안 혼자서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과연 인간을 나쁘다 좋다 라고 판단하는, 객관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기준이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건의 주범들은 유도의 고수였다고 하는데, 범인을 검거한 형사 중에도 당연히 유도를 연마한 분들이 있었고, 그분들 이야기로는 범인들이 자신에게는 그렇게 예의 바르게 처신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형량을 줄여보려는 목적이 아니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행동이었다고 하는데, 그것만 놓고 보면 적어도 유도인 사이에서 그 범인들은 무술 연마에 열심인, 예의 바른 후배였을 것입니다. 과연 범죄를 저지르기 전의 그 범인들은 착한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그리고 누가 봐도 끔찍한 범죄를 마치 게임을 즐기듯이 저지를 수 있는 심리상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의문은 그 후로도 상당기간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고 한참 후에 제가 내린 결론은 ‘우리’라는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인들에게 우리란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 가령 유도인 혹은 같은 조직에 포함된 사람들과 같이 아주 좁은 영역에 포함된 대상만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교류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고 그저 전봇대나 길가에서 자라고 있는 들꽃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전봇대를 발로 차고 나서 죄의식을 못 느끼듯, 그 범인들은 자신이 우리라고 느끼는 영역 밖의 사람들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를 때, 마치 우리가 들꽃 한송이를 꺾는 정도의 부담감밖에는 못 느꼈을 것이라고요.
가장 넓은 영역의 우리를 가졌던 분들은 슈바이처 박사나 테레사 수녀 혹은 이태석 신부 같은 분들일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안중근 의사와 같은 분들께 우리란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 전체였을 것입니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방송에 등장하는 미투와 갑질과 관련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예전의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누구나 아이가 사회적 신분이 높고,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과 같이 교류하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욕심이 잘 못 발휘되면 아이가 생각하는 우리의 대상을 무한히 좁게 만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공부 못하는 아이는 네 친구가 아니야, 가난한 집 애들하고 어울리지 마와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면 아이는 자신의 주변에 달팽이 껍데기와 같은 보호막을 치게 될 것이고, 부모가 교류를 금지하는 대상을 넓힐 때마다 그 껍질은 더욱 움츠러들어 마침내는 아이가 생각하는 우리는 부모가 허락한 최소한의 범위로 고착될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를 장식하는 미투와 갑질을 저지른 당사자들은 아주 좁은 범위의 우리들과 살고 있기에 그 밖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성폭력이나 폭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잘못을 지적받고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저 몇 푼의 합의금이나 영혼 없는 사과 같은 것으로 무마될 수 있는 하찮은 대상에게 저지른 장난이 그토록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도리어 어리둥절해하면서 말입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공유경제, 집단지성, 플랫폼과 같이 전 세계 사람들과 교류와 협력을 잘 해내는 인재들이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에 좁은 범위의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힘들 뿐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영역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실수 (차별, 갑질, 언어폭력, 멸시 등)가 언젠가는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평온하고 안락한 삶이라는 보호막을 쳐주려면 도리어 세상을 공평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대상을 넓혀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