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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별펭귄 May 15. 2024

사람은 글로써 전해지고, 글은 사람에 의해서 전해진다.

[책 리뷰] 루쉰소설전집 제1소설집<납함>, 루쉰 (을유문화사)



루쉰 

제1소설집 

납함





 루쉰의 제 1 소설집 [납함]은 나를 그 당시 중국의 한 마을로 데려간다. 함형주점에 손님으로 찾아왔던 쿵이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한 광인의 일기장을 살며시 보여주기도 하고, ‘아큐’라는 청년의 이야기, 아이를 잃은 산쓰 아주머니의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마치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주저리주저리 담소를 나누는 대로변 한복판에 서있는 듯 하다. 


 실제로 이 [납함]의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상호 간 관련 없는 별개의 이야기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일정한 통일감을 준다. '쿵이지'가 술을 마시곤 하던 함형주점에서 <내일>이라는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빨강코 라오꿍’이 ‘아우’와 함께 술을 마신다던지, <풍파>라는 에피소드에 등장한 ‘칠근’의 이야기가 <아큐정전>에서 이웃마을 뱃사공으로 설핏 스쳐지나가며 잠깐 언급되는 등 각 이야기들의 관련성을 보여주고 또 그에 맞게 변용을 하여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작가의 섬세한 문체는 나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어 마을의 모습,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 등을 마치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재현시켜준다. 이를테면 ‘쿵이지’의 경우 키가 훤칠하니 크고 창백한 얼굴에다가 주름 사이에 상처자국이 있고 제멋대로 흩어진 수염을 가졌다고 묘사된다. 또한 <고향>에서 마을 모습을 마치 사람처럼 누워있다고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무기력하고 씁쓸하며 처량한 느낌이 든다.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스산하고 황폐한 몇 개의 마을이
 
전혀 활기 없이
여기저기 가로누워 있었다.



 작가는 당대 중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대중적인 인물들이 아닌 그저 하루하루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중국의 상황들이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설의 흐름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 서술한다. 


 자서(自序)를 보면, 그는 문예를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고쳐야 한다고 여겼다. 물론 그는 잡지의 출판이 도중에 중단되는 실패를 맛보기도 하고, 적막함에 휩싸여 정신적인 고통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미래 다가올 희망을 글로 썼다. 앞날을 예견하기 힘든 변혁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사람들의 변화를 바라는 소망을 내비친다. 







광인일기




 <광인일기>는 말 그대로 피해망상증의 일종을 앓았던 한 광인이 쓴 일기내용이다. 소설 초반에는 한 사람이 느닷없이 사람들이 자신을 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고 여기며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일기를 끝까지 보고나면 광인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은 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미치광이이지만 미치광이가 아니다. 표면적인 일기의 내용만을 보자면 그는 부정할 수 없는 광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 누구보다 이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가 처해 있는 현실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변혁기 시대의 한 선구자이자 대변인이다. 




 그가 사용한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 식인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관리가 남의 아내를 빼앗는다든지, 지주가 소작인을 억압한다든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다든지 등 그가 마주한 사회적 현실은 각박하다. 작가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며 미치광이의 목소리를 빌려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작가의 희망은 소설의 머릿말과 끝맺음에서 잘 드러난다. 


마지막 일기에서 광인(狂人)은 ‘아이들을 구하자’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또 소설의 앞부분을 보면 광인은 훗날 완쾌하여 모지(某地)로 부임하여 임관을 기다린다고 쓰여있다. 나는 그 광인이 학교로 임관할 것으로 짐작한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가 지닌 희망과 미래를 전하려 할 것이다. 







쿵이지




 <쿵이지>는 ‘쿵이지’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앞서 말한 광인이 작가를 대변하는 선각자적 인물이었다면, ‘쿵이지’는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봉건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우리는 그가 하는 말이 온통 ‘지호자야’를 붙인 문어(文語)투성이였다고 묘사하는 대목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쿵이지는 원래
글을 읽는 선비였으나

끝내는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으며,

게다가 생계를 이어가는 방법도
몰랐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흥선 대원군이 나날이 변화하는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척화비를 세운 것과 같이 ‘쿵이지’도 변혁기 시대를 살아가면서 끝까지 옛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회의 흐름에 따르지 않던 그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결국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한다. 





 작가는 왜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무참히 짓밟혔던 ‘쿵이지’ 같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것일까. 


그는 죽어야 마땅한 악인도 아니다. 그는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고, 외상을 미룬 적이 없는 꽤 양심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착한 사람도 아니다. 책을 도둑질하고, 일하기를 싫어하는 나쁜 버릇이 있기도 하다.


 작가는 그저 누군가를 옹호하고 또는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쿵이지라는 인물의 성향 그 자체를 보여주면서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를 통해 그 시류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보여줌으로써 사람들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큐정전




<아큐정전>은 형식을 갖춘 정전의 형태로 ‘아큐’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이다. ‘아큐’는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신선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심지어 성명도 본적도 불분명하다. 


 오히려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키기 위해 자기의 뺨을 때린다든지, ‘왕털보’보다 이(해충의 일종)가 조금밖에 없다고 약올라 한다든지 등의 모습을 본다면 왜 그를 주인공으로 한 정전을 쓰나 싶은 생각도 든다.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 같기도 하다. 


 소설을 읽다보면 ‘아큐’가 사회에서 발생하는 크나큰 일들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소시민적인 자세로 살아감을 알 수 있다. 결국에 그는 신해혁명이 발생했던 혼란스러운 사회의 지류에 휩쓸려 총살을 당하게 된다. 





 작가는 ‘아큐’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큐’와 동일선 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애초에 그의 이름에 불특정한 ‘Q’라는 문자를 이름에 대입한 것은 다른 누군가도 ‘아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아큐’처럼 뚜렷한 명목 없이 혁명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 이처럼 ‘아큐’는 그 당시 많은 소시민적 태도를 견지하던 중국인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그가 구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자신도 잘 몰랐다.



       







 언젠가 다녀왔던 루쉰 기념관이다. 루쉰의 대표작 <광인일기>를 모형으로 전시해 둔 작품이 인상깊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 루쉰은 사람들에게 글로써 희망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 무작정 사람들을 계몽시키려 하기보다는 루쉰은 그들이 이 시대의 흐름 안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제각기 모양들을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관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나가기를 염원한다.


 이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소설 안에 담겨 있기에 루쉰은 독자의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는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루신이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 과거의 한 중국의 마을과 독자를 이어주는 소통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었음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민트별펭귄 

인용 출처 :『루쉰 소설 전집』루쉰, 을유문화사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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