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루쉰소설전집, 루쉰 (을유문화사)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곧 길이 된 것이다.
납함.
그의 소설의 머리말이다. 사전으로 '납함'의 뜻을 찾는다. 납함은 '적진을 향해 돌진할 때 여러 군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세상을 향해 돌격하며 글로 소리를 내지른다. 그가 내지른 고함을 듣는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적막함을 느낀다. 친구의 권유에 따라 글을 쓴다. 그는 자신이 느낀 세상의 적막함 속에서 소리를 내지른다. 그는 이 세상이 쇠로 된 방이고 사람들이 모두 죽어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고함을 내지른다. 그로 인해 깨어날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 세상의 적막함을, 희박한 공기의 막막한 세상을 깨부수리라 희망을 가지면서.
추억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즐겁게 하기도 하나
때로는 사람을 적막하게 함은
어쩔 수 없다.
오랜만에 루쉰의 소설을 읽는다. 다시 책을 펼친 지금 나는 적막함 가운데 서 있다. 작가의 고함은 누구에게 들렸는가.
지금의 나는 그의 고함소리에 깨어났는가.
알고 보니 당신마저도!
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흑백의 이미지 파편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것을 느꼈다. 생의 조각들과 그 조각들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주먹밥처럼 투박한 손길로 뭉치고 뭉쳐져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생사고락들, 시시각각 죽어가는 사람들,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루쉰이 쓴 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당대 사회의 중국인들의 특히 시골 마을들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사가 드러난다. 루쉰은 소시민들의 일상을 소설로 전하며 그들이 직면한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이야기한다.
광인이나 광인이 아닌 자의 글을 본다. 방정맞은 아큐와 그의 비참한 죽음을 바라본다. 인간의 양면성을 바라본다. 때로는 과장되고 때로는 소탈한 그 모든 삶의 구성들은 수많은 인간사의 뒤섞임은 우리의 내면을 오롯이 바라보게끔 한다.
그가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자신도 잘 몰랐다.
고단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있다. 그가 직면했던 향촌의 삶은 비극적이다. 미신에 의거해 주먹구구식으로 치료받는 등 제대로 된 처방을 받지 못해 죽어갔던 무고한 아이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만 가고 있는데 여전히 봉건적 문화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좀먹는 사람들,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노력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자기 자신마저 놓아버리고 마는 지식인들의 애환들이 서려 있다.
무심코 걷던 중 내려다보았던 발치에 밟힐 뻔한 개미들이 생각난다. 하루하루 삶을 연명해 나가기에 급급한 사람들을 글로 풀어내며 루쉰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생의 비참함이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들이 물밀 듯 몰려온다.
조물주는 너무나 무책임하다.
비록 그의 도움을 받았을지 모르나,
나는 그에게 반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네들의 이름을 바라본다. 샤오수안(小栓), 라오수안(老栓). 작은 수안과 늙은 수안. 당대를 살아갔던 서민들의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덮고 나면 너무도 쉽게 잊힐 이름이지만 그럼에도 한 자 한 자 그네들의 이름을, 그네들이 살아왔던 족적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별로 다르지 않다.
(古今人不相遠)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기에 생의 비참함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우리네들 곁에도 있다. 자신만의 이익을 구하고 남들의 아픔과 상처에 무관심한 사람, 그저 소문에 쑥덕대기 바쁘고 남 이야기에 재고 비교하느라 바쁜 사람.
그러나 작가는 묻는다. 그 사람들이 결국 자신들 본인은 아니었는지, 나만의 이익을 좇고 나만 잘되면 되지 생각하며 남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보게 한다.
먼 데 물은
가까운 불을
끌 수 없다.
루쉰의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소설들은 계속 이어진다.
다만 나는 그 안에서 한 줄기 희망의 단편을 보았다. 바로 작은 사건(一件小事)이다. 작은 사건은 말 그대로 화자가 겪은 작은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글쓴이는 인력거를 타고 길을 가던 중이었다. 별안간 한 사람이 그가 타고 가던 인력거에 걸려 넘어졌다. 따지고 보면 인력거꾼의 잘못은 추호도 없었다. 심지어 인력거꾼은 지나가는 그 사람을 위해 길도 비켜주었다. 잘잘못을 따지고 보면 길을 서두르며 발걸음을 놀리던 사람의 과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력거꾼은 차분히 인력거를 세우고 넘어진 사람이 크게 다치진 않았는지 묻는다. 비록 그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 할지라도 인력거꾼은 사람을 친절히 부축하고 다친 곳은 없는지 정성스레 살핀다. 그리고 인력거를 탄 손님께 공손히 사정을 설명하고는 넘어진 이를 데리고 파출소에 간다.
글쓴이는 스쳐 지나가는 일일 수도 있는 이 사건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은 본질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위해주는 마음,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이 세상을 꿰뚫을 수 있는 이치가 있다고 믿는다. 결국 작가는 작은 사건을 통해 본질에 대한 의미를, 진정한 인간의 의미를 살포시 들여다본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만약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루쉰이 살았다면 그는 역시나 이와 똑같이 신랄한 풍자로 점철된 소설을 썼으리라 예상한다. 우리는 저출산, 경제위기, 실업난, 물질만능주의 등등 인간성이 옅어져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AI 등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 사이에서 우리들의 도덕성과 가치관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어찌 보면 우리들은 이 소설에 등장한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여전히 우리는 몽매하기 그지없고,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들에 속기도 하며, 대변혁기에 구식을 답습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다만 작가는 그런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고함을 지르고 있다. 정신 차리라고, 적어도 인간성을 말살시키며 진정한 가치를 놓치고 살아가진 말자고 소리를 지른다.
그의 고함소리가 적어도 나에게 와 닿았기를, 한 두 사람의 귀에는 들렸기를, 그래서 깨어났기를 바란다. 세상이 조금은 살 만해지기를, 세상이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밝아지기를 바라본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 『루쉰 소설 전집』루쉰, 을유문화사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