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일인칭 단수>.
내 인생의 첫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다. 학창 시절 그의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보았다. 1Q84, 노르웨이의 숲 등 그의 이름을 내세운 수많은 작품들이 베스트셀러로서 서점에서 자주 보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반항아 기질이 다분한 사춘기였다. 유명하다면 할수록 더더욱 읽고 싶지 않아 더 구석진 곳에 있는 책을 읽었다. 행여나 책을 추천이라도 받으면 그것 또한 읽지 않았다. 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날그날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말 그대로 청개구리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싶기도 하다. 수많은 이들의 추천을 받은 좋은 책을 읽을 기회를 걷어 찬 것이 너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글을 열심히 읽어보려 다짐한다.―
당시의 난 책 속으로의 몰입 그 자체를 즐겼던 듯싶다. 마주한 답답한 현실을 피해 도망칠 곳으로 책을 택했다.
그래서 나는 늘 책을 오롯이 책으로 읽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책이 정말 좋아서 읽는 사람들, 탐구하며 읽기 그 자체에 매료된 사람들이 부러웠다. 필사도 하고 여러 번 읽고 다양한 방식으로 맛보는 독서를 질투했다.
―.
시간이 흘렀다. 나이를 먹었다. 어쩌다 보니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어쩌다 보니 다양한 책을 읽게 되었다. 책 리뷰를 남기기도 하고 필사도 하게 되었다. 내가 이런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면 그 청개구리는 얼마나 놀라 펄쩍 뛸까.
한편 브런치 덕분에 더 많은 책들을 알게 되고 다양한 책들에 관심이 생겼다. 세상의 다양한 책들을 읽어보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듯 다양한 책들을 만나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지금은 아직 첫 시작이니만큼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먼저 마주해보려 한다. 잘 알려진 책이지만 유명하다고 일부러 외면했던 책들 중 하나를 집어든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을 집어 든다. 그는 어떤 작가일까.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그의 사고의 세계로 풍덩 뛰어들었다.
(*하단 내용에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으니 참조 부탁드립니다.)
단카(短歌). 한자 의미 그대로 해석하면 짧은 시.
단카의 매력들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말과 기억의 상관관계 속 저 먼 곳에서 아스라한 별빛이 스쳐 지나가는 시공간에 잠시동안 머물다 나온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 그녀가 지은 단카는 형용할 수 없는 우주 그 자체의 분위기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삶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인생무상의 감정들이 있었다.
두 번 다시는
만날 일 없네
생각하면서도
못 만날 리
없다고 생각하는
짧은 시나 구절이 매력적인 이유는 짧은 어구 속에 온 세상이 담겨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함축된 단어 속 농밀한 이 세계의 비밀들이 살며시 젖힌 커튼 사이로 한 줌의 빛줄기처럼 우리 눈앞에 사르르 펼쳐지는 듯하다.
만나려나
그저 이대로
끝나려나
빛에 끌리고
그림자에 밟혀
우리는 교차하는
두 줄의 직선처럼,
한 지점에서
잠깐 만났다가
그대로 멀어진 것이다.
그와 그녀는 단지 하룻밤 잔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단카(短歌)는 그의 삶 사이사이에 끼인 책갈피처럼 비스듬히 꽂혀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담긴 울림은 시간의 힘으로 멈출 수 없다. 그녀의 시는 진동하는 삶의 파동으로 한 사람의 인생에 크고 작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언젠가 시집을 읽고 리뷰를 써봐야겠다고 욕심이 생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 직장을 다니며 삶의 의욕은 일도 없는 톱니바퀴 속 부품과 다름없던 삶이 책과 함께하며 점점 변하고 있다. 나는 이런 내 마음의 변화가 꽤 마음에 든다.
'크렘 드 라 크렘'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
단편작 <크림>은 <일인칭 단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중 하나이다. 그저 한 사람의 인생의 긴 시간 중 베어낸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 순간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그로부터 삶의 위안을 받고 마음 깊이 공감했다.
우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람들로부터 의도치 않은 상처들을 많이 받는다. 그저 불운일 것이라 치부하고 능구렁이 담 넘듯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괜스레 억울한 마음에 세상을 향해 울분을 터뜨려보기도 하면서 제각기 받은 상처들을 해소해 나간다.
하지만 그 상처를 겪은 우리들의 진짜 마음은 어떠한가. 정말이지 이유도 모르겠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처를 사람들로부터 받은 억울한 심정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작가 역시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 것일까. 하루키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마데카솔을 살포시 얹어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투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상처받고 주저앉아 있는 소년에게 한 노인이 다가와 말한다.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 영문도 모르겠고 뜻은 더더욱 모르겠는 말을 내뱉는다.
처음엔 수수께끼인가 싶어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정답이 무엇일까. 만다라 문양인가 아니 꽃일까. 아니야 구름이지 않을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도, 저 소년도 그 원의 정답은 여전히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가면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도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여러분도 나처럼 작가의 이야기에 위안을 받고 갔으면 좋겠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다 괜찮아진다는 단순한 위로의 한 마디보다 그의 이야기 한 편이 당신의 마음에 더 깊이 와닿을 것이다.
뭔 이름이 이렇게 길고 어렵지. 제목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보사노바..? 카사노바..? 사람 이름인가. 열두 음절인데 하나 같이 전부 낯설었다.
내게 어려운 열두 음절은 바로 레코드 음반 제목이었다. 음악 쪽에는 문외한인 나로서는 찰리파커도 보사노바도 모두 미지의 세계였다.
실존 인물을 차용한 것일까. 인터넷에 가수의 이름을 검색한다. 찰리 파커는 1930년대에서 1940년대 무렵 왕성히 활동한 재즈 음악가다. 은연중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음악 분야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지나가듯이 들었던 기억이 생각났다.
유튜브에 '찰리 파커'를 검색한다. 조회수가 높은 그의 재즈 동영상을 재생했다. 나는 지금 그의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작가도 찰리 파커의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썼을까.
약 15년 후, 그 글은 생각지 못한 형태로 나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마치 허공에 던져놓고 잊어버렸던 부메랑이 예상도 못한 순간에 되돌아오듯이.
소설 속 그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자신이 지어낸 가상의 음반 관련 평론이 실제 음반이 되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스쳐 지나간 '찰리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그 음반은 어떤 곡조를 담고 있을까.
그의 짧은 글은 부메랑처럼 음악으로 돌아왔다. 펜의 촉감으로 쓰인 글자가 음표로 변하고 그 형체는 무형의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글은 다른 세계가 되어 그에게로 돌아왔다. 마치 우리들이 소설을 읽고 다른 세계의 나 자신이 되듯이.
그는 한 편의 글로 한 독자의 음악적 세계의 지평을 한 발짝 더 넓혀주었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너 그 노래 들어봤어?'하고 추천을 받은 기분이다. 들려오는 재즈 소리 너머로 따뜻한 봄바람이 선뜻 불어오는 듯하다. 작가에게 직접 소개받은 가수의 음악은 더 매력적으로 들려온다.
흘러나오는 찰리파커의 음악을 들으며 몸을 이리저리 들썩이며 흥겨움에 올라타본다. 재즈의 선율이 울리는 산뜻하고도 아름다운 하루가 기분 좋게 흘러간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의 음악은
그 시절의 우리를
마치 벽지처럼
구석구석
에워싸고 있었다.
음악은 참 신기하다. 음악은 우리 마음속에 그 선율이 꽂힌 다름 아닌 그 순간, 그날의 온도, 습도, 분위기를 담고 있다. 나에게도 그런 음악이 하나 있다. 그 음악을 들으면 과거의 특정 순간이 눈앞에 촤르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그에게는 비틀즈의 노래가 바로 그런 음악이었다.
그는 비틀즈의 음악을 벽지 삼아 학창 시절을 보낸다. 다만 비틀즈 음악이 꽂힌 순간에 함께한 그녀는 아쉽게도 그의 인생에서 스쳐 지나가는 조연이었을 뿐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른이 된 그가 예고 없이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잊힌 기억 속에 있던, 그러나 인생에 선명한 한 획을 긋고 떠난 이의 죽음. 그 죽음은 당혹스럽고도 허무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물론 죽음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지
···(중략)···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완만한 것이기도 해.
자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프레이즈와 마찬가지야. 순식간에 지나가는 동시에, 한없이 잡아 늘일 수도 있지.
동쪽해안에서 서쪽 해안만큼 길게 ― 혹은 영원에 다다를 만큼 길게.
오직 시간만이
도도하게,
그러나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시간은 길게 늘어지기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그 안에서 우리들의 인생은 허무하리 만치 멀고도 험하다. 시간은 그럼에도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 앞으로 흘러간다.
우리 인생은 허무하리만치 먼지 같다가도 빛을 내뿜으며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 주문 같기도 하다. 짧고 길게 늘였다 줄일 수 있는 완만한 죽음처럼 말이다.
하루키의 단편들은 모두 짧다. 참 신기하게도 정처 없이 멍하니 서있는 나를 그 짧은 서사 속에 눈 깜짝할 사이에 들여다 놓는다. 문학계의 거장이 된 이유를, 지금까지도 그가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담담하면서도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의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어 다행이다. 뒤편에 수록된 단편집들도 기대가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살며시 다음 책장을 넘겨본다.
넓은 세상 하루하루 부지런히 읽어도 다 못 읽을 수많은 책들이 저 먼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다. 나는 책으로 가득한 활자의 바다에 드러눕고 싶다. 함께 사유하고 생각을 나누고 싶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일인칭 단수』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