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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별펭귄 Feb 28. 2024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

[책 리뷰]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물음이 생겼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게 소설이 아닌가?


에세이집인가?


 느닷없지만 너무 궁금해서 책 표지를 다시 봤다. 분명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이 서사구조와 내용은 무라카미 하루키이자 소설 속 주인공인 '나'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 에세이 아닌가. 내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나 싶었다.


 아리송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가다 단편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에 이르렀다. 단편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등장한다. 이 단편 덕분에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책이 맞다는 사실을 겨우 인식했다.




이처럼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주인공 '나'가 들려주는 편안하고도 부드러운 한 편의 에세이집이다. 조곤조곤 누군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듯 편안한 마음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일인칭 단수>를 읽는다는 건 마치 친한 친구와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수다를 떠는 기분이다. 친구에 대해 알아간다. 그 친구는 나와 비슷한 듯 다르다. 취향도 성격도 좋아하는 취미도 무언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나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색다르고 굉장하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조금 더 넓어진다. 때로는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게 되는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사실관계가 어떻든 간에 이 소설은 결국 나를 향한 이야기이자 '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독자들 각자의 삶에서 비롯된 각각의 '나'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나'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래도 작가님의 매력에서 당분간은 헤어 나오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도 하루빨리 읽고 싶다는 욕심이 인다. 큰일이다. 읽고 싶은 책은 갈수록 많아지는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제 앞길만 보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할 따름이다.


(*하단 내용에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이 있으니 참조 부탁드립니다.)






[단편]

『야구르트 스왈로스 시집』




 제목에 들어있는 야구르트와는 별개로 <야구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지난 단편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와 비슷하게 작가님은 나의 비좁은 세계를 넓혀주려고 하신 것에 틀림없다.


 내 취미의 세계는 빈약한 편이다. 지난번 재즈 분야도 그렇고 이번에 이야기할 야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가끔 주변에서 응원하는 팀이 있으면 함께 응원해 주고 경기를 몇 번 보러 가는 정도다.




 한편 소설 속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야구라면 가슴부터 두근거리던 소년이다. 그는 <야구르트 스왈로스>의 팬이다. <야구르트 스왈로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한화 이글스 같은 일본의 야구팀이다.


경기를 하면 자주 지곤 하는 팀. 하다못해 선수들이 경기를 못해도 팬들이 그렇군 하며 해탈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1등과는 거리가 먼 그런 팀이다.


―한화 이글스 팀과 팬들을 비하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야구와 관련된 지식이 다소 부족하여 혹시라도 잘못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댓글로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한화 팬인 친구를 떠올리며 작가님의 마음을 상상해 보며 책을 읽었다.



 맥주를 홀짝이며 늘 그렇듯 지는 경기를 보는 '나'는 그날그날의 경기를 감상하며 느낀 생각의 자투리로 시를 짓는다. 때로는 선수를 주의 깊게 관찰하기도 하고, 경기에서 패배하는 팀을 보며 인생의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데서 나온다.



 '진다는 것'에 대한 통찰은 내게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인생을 살며 수많은 패배를 마주할 때, 어떻게 잘 질 것인가.


 잘 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긴 상대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 패배를 거름 삼아 다음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것?

 


 저자는 소설 말미에 이르러 그가 얻은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 감사하고자 한다. 글이 잘 써지든 안 써지든 간에 이 시간은 오롯이 나의 시간이고 나의 삶이다. 미래의 내가 이 날들을 뒤돌아 봤을 때 멋진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본다.





[단편]

사육제

(Carnaval)



  음악과 함께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단편작 <사육제>가 다름 아닌 슈만의 <사육제> 피아노 연주곡에서 비롯된 제목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에게 음악을 들을 것을 권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듣고 싶게 만든다. 나는 피아노의 미묘한 멜로디의 파동 속에서 문장을 따라갔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아름다움과 추함, 가면과 민낯, 해와 달, 빛과 그림자...


 세상에는 수많은 정(正)과 반(反)이 존재한다. 어느 한쪽만 있을 수 없다. 플라톤이 말했던 현실과 이데아가 떠오른다. 세상 어디에나 늘 있다.


 나 역시도 세상을 향해 둘러쓰는 가면과 그 밑에 민낯이 있다. 그 어떤 사람도 가면과 민낯이 없을 수가 없다.  


 

 저자는 슈만의 피아노 곡 <사육제>를 가면과 민낯, 그 둘 사이를 스윽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 비유한다. 피아노 건반에도 흑과 백이 있다. 그러나 <사육제>는 흑과 백 사이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가는 미묘하고 마법적인 곡으로 표현된다.


  늘 스쳐 지나가듯 듣던, 아니 들었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육제>를 귀 기울여 들어보았다. <사육제>의 어떤 매력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이어준 것일까 궁금했다.



추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솔직히 음악적 조예가 작가만큼 깊지 않은 나로선 <사육제>를 수 차례 들어도 다른 여느 피아노 연주곡과의 극명한 차이를 모르겠다. 다만 이 소설을 읽을 땐 <사육제>를 들어야 한다는 것 하나만은 알겠다.


 해 질 녘 새까맣게 변한 산 너머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황혼의 빛과 검은 산의 그림자가 대조를 이룬다. 쓸쓸하면서도 정겨운 공기의 움직임. 슈만의 <사육제>는 그런 바람 같은 존재로 현실과 이데아 사이를 고요하고도 울림 있게 빠져나간다.




 


[단편]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이 세상에 사람 말을 하는 원숭이가 있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실을 믿을 것인가.


 나는 도저히 못 믿겠다. 아니 못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내게 '혹시 몰라, 그런 원숭이가 한 마리쯤은 있을 수도?'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만큼 저자의 이야기는 신빙성과 설득력을 모두 갖췄다. 잘못하면 껌벅 속아 넘어갈 것 같다.



제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사람 말을 하며 료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원숭이. 인간 여성을 사랑하지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는 시나가와 원숭이.


 그는 결국 사랑하는 인간 여성의 이름 한 조각을 훔친다. 그를 품어주고 덥혀주는 한 조각의 이름은 그가 계속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궁극의 연애와 궁극의 고독을 경험하는 원숭이를 향해 '나'는 연민을 느낀다.



 아무리 선명한
기억도
 
시간의 힘은
좀처럼
당해내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원숭이는 그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순간 깜박 잊은 한 여자로 인해 그의 기억 속 시나가와 원숭이는 다시 현재로 촉발된다.


 인간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신비롭다. 잔뜩 물건이 뒤섞여 찾을 수 없는 상자 속에서 갑자기 눈에 띈 한 장의 사진처럼 우리의 기억은 느닷없이 과거의 일부를 지금 이 순간에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의 현재는 원숭이와 맥주를 함께 나누었던 멋진 과거를 회상하며 또 다른 지금을 만들어간다. 우리들의 시간도 그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읽으며 지금 이 순간을 만들어나간다.






[단편]

일인칭 단수



 이따금 우리 삶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위화감을 이토록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단편 <일인칭 단수>는 짧고도 강렬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자유시간이 생겨서,
뭐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지만,

 그게 뭔지 영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그는 정장 슈트를 차려입고는 바에 가서 책을 읽는다. 그날 하루 따라 왠지 막연한 위화감이 그에게 엄습한다. 그리고 모르는 여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살면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날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평상시와 다름없는 데도 무언가 불편한 위화감이 몰려오는 순간이 있다.



 작가의 마음에 공감했다. 하지만 그와 내가 느낀 위화감을 지금 당장 설명하려 하면 말문이 막힌다. 위화감이란 단어 외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일인칭 단수>를 읽어보라고 권유할 수밖에.


 작가란 실로 대단한 존재다. 글로는 전해지기 힘든 감정을 전하는 모든 작가님들을 존경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온갖 감정과 기분들은 제각각 모양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작가를 만남으로써 글로 표현되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세밀하게 느끼고 글로 표현함으로써 생명력을 갖춘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한편 우리는 각각 일인칭 단수로 실재한다. 오늘 내린 당신의 선택은 미래의 일인칭 단수인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렇기에 별 것 아닌 시간들 같지만, 스쳐지나가는 찰나 같지만 지금의 선택들과 주어진 시간에 충실해야 한다. 그대가 숨을 내쉬는 지금 이 순간도 당신은 선택을 내리고 행동하고 있다. 







<일인칭 단수>는 곧고 일정하게 나아가는 시간 속 우리들의 삶과 기억을 살며시 들춰보게 만든다. 작가는 스쳐 지나간 인연과 죽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 다시 떠오른 과거의 기억들 등 우리 삶의 다양한 소재를 글감으로 데려와 책 속에 요리조리 펼쳐놓는다.


 우리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고 사유한다. 때론 공감하기도 하고 새로운 취향을 배우기도 하면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다시 우리 삶의 멋진 기억들로 현재를 구성한다.


한 층 더 넓어진 나의 세계를 마주한다. 계속해서 나의 삶을 더 행복하고 멋진 기억들로 채워 넣기를 바라본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일인칭 단수』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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