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인드빌더 Feb 18. 2022

가치

왜 사냐건 웃지요

가치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 많이 있을까? 내가 왜 사는지 질문을 던져본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상담실에서 실존적인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어떤 생존의 절실함이 담긴 질문으로 이 말을 들으면 가슴이 잠시 출렁인다.


사람들은 왜 살죠? 다른 사람들은 왜 산다고 하나요?


삶에서 이렇게 무서운 질문이 있을까. 어린이들이 보는 와이 시리즈처럼, 어른을 위한 와이 시리즈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왜 살까? (결혼을 하는 사람들은) 왜 결혼할까? 왜 공부를 할까? 왜 아이를 낳을까? 왜 사람을 사귀어야 할까? 왜 학교에 다닐까?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왜 사냐의 질문을 하기도 전에 삶이 흘러가는 이유와 목적을 찾게 되는 것만 같다. 사랑이니, 가족이니, 돈과 명예니 하는 것들을 의문을 갖지 않고 마음속에 담고 받아들이며 살게 된다. 이것도 행운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고 주어진대로, 혹은 주변에서(특히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살다가 삶의 어떤 순간에 이 문제에 봉착한다. 왜 살지?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지? 이 질문은 주워 담을 수 없는 질문이다. 어딘가에서 본 글이었는데, 프로이트나 다윈의 주장이 강력한 이유는, 일단 무의식이나 진화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에는 설명을 듣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무의식이나 진화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때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오는 이론이기 때문에 강력하다는 설명이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인 문제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고 순응적으로, 남들처럼 사는 삶이 왜 의미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심리치료가 단순히 문제를 없애고 증상을 회복시키는 것에 중점을 둘 때 쉽게 간과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고, 소망하는 삶의 모습이 다르다. 회복을 한 뒤에 이런 부분을 알아서 찾아가라고 하기에는 병은 쉽게 낫지 않고, 병이 아니더라도 고질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나의 어떤 부분은 쉽게 날 놓아주지 않는다. 가끔은 문제와 함께 살아가야 하고 증상을 등에 지고 살아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거운 짐을 들고도 걸어가는 것처럼 삶을 살아간다. 아픔과 짐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멈출 수는 없기에. 그리고 그렇게 어딘가로 가다 보면 짐이 조금 가벼워지기도 하고 병이 호전되기도 한다. 둘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갈지 알 필요가 있다. 그게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밥 한 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