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상 위에는 내가 대여섯 살쯤 그렸던 그림이 한 장 붙어있다.
이리저리 다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어린 내가 그렸던 그림.
잘 그렸다 혹은 못 그렸다고 평가가 불가한,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나의 가슴과 가깝게, 순수함 그 자체로 그린 그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어린 나는 그림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새벽이면 혼자 일어나서 주무시는 엄마와 아빠 머리맡에서 그림을 그렸다. 부모님은 아이가 먼저 일어났다고 보채거나 깨우지 않고 혼자 그림 그리던 모습이 그렇게 신통하셨다고 하셨다.
자유롭고,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를 긋는 행위 자체가 행복하고, 하나하나의 컬러가 갖는 고유함이 신기해서 세상의 모든 색을 크레파스로 만들어서 갖고 싶었던 순수한 마음.
종이에 그으면 선과 색을 통해서 내가 의도한 대로 그려지는 크레파스, 그것만의 색, 서로 이루는 조화, 미묘한 차이, 섞었을 때의 다른 색으로의 변화 등 컬러에 대한 신비로움과 경이가 아직 내 마음에 남아있다.
지금도 정신이 맑은 새벽에 그리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어렴풋하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내 안에 남아있는 듯하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몰입하여 시공간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
그려도 그려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상태.
그림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평가 없이 내가 창작한 모든 것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상태.
그냥 순수하게 그림을 사랑했던 마음.
어린 시절 그림과 색에 대해 순수하게 경험하고 느꼈던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남아있기를, 그것들이 다시 나에게 발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증권사에 다니던 폴 고갱은 마흔 살이 된 어느 날 어린아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가 되리라고 결심을 하게 했고 남은 인생을 평생 그림에 몰두하는 화가의 길을 걷게 했다.
피카소는 라파엘로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4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했지만, 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평생을 소비했다고 말한다.
마흔이 된 어른이 어린아이가 되고 싶고, 라파엘로처럼 잘 그리는 사람이 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기 위해 평생을 매달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망보다는 그냥 즐겁게 좋아하는 마음, 담백한 순수함으로 몰입하여 삶을 살아가는 태도, 그런 태도로 자유롭게 상상하고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창작자로 성공해야 한다, 돈, 명예 등 이루고 싶은 욕망이 지나치게 타올라 모든 것이 내뜻대로 안된다고 조바심이 나고 불안에 휩싸일 때가 있다.
잠시 멈추어서 어린 시절 내가 그렸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꼬마 아티스트가 보인다. 그 아이에게 가만히 물어본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그림을 사랑하게 했느냐고,
어떤 목표나, 이유가 없다.
그냥 이 자체가 좋아서 그린다는 굉장히 심플한 답이 마음에서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