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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디톡스 Mar 13. 2023

자기 수용의 요체 및 긍정 확언을 통한 자기 수용

앞서 자기 수용이 어려운 이유를 뇌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비합리적 신념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적 측면으로 살펴보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수용을 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which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하나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 평온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 제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해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현대신학의 거장인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자기 수용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문의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 ‘평온한 마음으로 수용’이라는 문구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온한 마음으로 수용’이라는 말이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용에 대한 표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기’ 혹은 ‘자신’이라고 일컫는 ‘나’는 간단히 말해, 나의 외모, 능력(조건), 성격 그리고 내가 살아온 과거와 같은 네 가지 영역에서 자신이 느끼는 ‘나라는 느낌’의 총 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수용은 이 네 가지 영역에서의 나를 수용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변화시킬 수(통제할 수) 없는 것들 즉 자신의 작은 키, 잘 생기지 않은 얼굴, 자신이 생각할 때 마음에 들지 않은 성격, 지능(IQ) 혹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 등에 대해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 채, 계속 아쉬워하거나 못마땅해 하곤 합니다.

  그러고는 정작 자신에 대해 스스로 변화시킬 수(통제할 수) 있는 것들 즉 운동과 다이어트, 금연, 금주, 독서, 자기 분야의 전문성 키우기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에너지를 오롯이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미련을 가지고 아쉬워하면서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지요.

  위의 표에서 자신에 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의 항목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의 항목을 10개 정도만 나열해 보시고 자신의 현 상황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확인해 보시고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 위의 기도문을 큰 소리로 3회 정도 되뇌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 평온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 

 제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해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혹 불교 등의 다른 종교를 믿으시는 분들은 하나님 대신, 부처님이라고 하셔도 좋겠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서 살펴볼 것은 자신의 과거에 저지른 실수 등에 대한 수용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수용한다는 것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타인에 의해 입은 상처 이 두 가지 측면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과거를 돌이켜볼 때 마음에 걸리는 크고 작은 후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의 경중을 떠나서 과거 자신이 실수 내지는 못마땅한 행동이나 잘못된 결단을 내린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습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나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 꿈과도 같습니다. 어제 내가 실수를 한 일이나 어젯밤 꿈속에서 큰 실수를 한 일이나 지금 생각해 보면 둘 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일 뿐입니다. 뇌 과학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뇌가 실제와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꿈처럼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을 계속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자신을 질책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상처만 입힐 따름입니다. 또 어찌 보면 그때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당시에는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일이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미래는 단 1초 뒤도 알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수용하는 확언입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든, 내게 못마땅한 점이 있든, 그런 나를 받아

  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나를 받아들입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수치심, 죄책감 등을 내려놓습니다.

  이제 내 안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를 용서할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를 용서할 용기를 낸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나는 나를 깊이 사랑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축복합니다.”


  이런 확언들이 실제로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세포의 98%가 두뇌에 새겨지는 언어의 지배를 받습니다. 특히 인간의 행동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우리의 무의식은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며, 부정어를 처리 못하고, 반복적이며 생생한 것에 반응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실제와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의식이 매초 40개(28만 분의 1)를 처리하는 반면, 무의식은 매초 1,100만 개를 처리합니다. 행동을 통제하는 측면에서는 의식이 2~4%를 담당하지만, 무의식은 무려 96~98%를 담당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확언을 반복해서 말할 때, 우리의 의식은 자신의 아쉬운 점이나 못마땅한 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무의식은 서서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확언을 가급적 자주, 매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혹여 이런 확언의 효과가 의심되신다면, 다음의 확언을 해 보셔도 되겠습니다. 아니 너무 위험하니, 절대 말로 따라 하지 마시고, 눈으로 한번 스치듯이 보셨으면 합니다.


  “나는 암이 커져가고, 눈이 멀어가고, 계속 아프고, 다음 해 생일에는 죽을 거야!”

  끝으로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수용하는 확언을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은 루이스 헤이의 <치유>에 소개되는 확언입니다. 따라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끝없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은 완벽하고 온전하며 완전하다.

  나는 항상 건강하다.


  나는 이제 내 안에 있는 정신적인 패턴 중에서

  병을 일으킬 만한 것들을 버리고자 한다.


  나는 자신을 사랑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몸을 위해서 영양분이 되는 음식을 먹고 마신다.

  나는 재미있는 방식으로 운동을 한다.


  내 몸은 훌륭하고 놀라운 기계와 같아서 나는 내 몸을 보며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넘쳐나는 에너지를 사랑한다. 나의 세상에서는 모든 일이 순조롭다.”


  이어서, 다음의 확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나는 비록 지금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앞으로 당분간은 나를 온전히 수용할 수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수용하며,

  나만의 탁월성과 잠재력을 발휘하며,

  앞으로 나의 인생을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 것을 선택합니다.“


지금까지 자기 수용에 도움이 되는 확언을 위주로 말씀드렸는데요, 다음 주제에서 다른 관점에서의 자기 수용 방법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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