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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 이렇게 해야 제가 살 수 있어요.

정중한 이별

by 새벽달풀

도하는 끝내 어머니를 부탁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내가 먼저 물었다.

"제일 마음 쓰이는 건 어머니일 텐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아?"

"네가 알아서 할 거니까..."

그 답이 다였다.


도하를 보내고 몇 달 후,

어머니께 이런 말을 들었다.

도하가 어머니께 '서윤이 말만 잘 들으면 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미안해서 부탁하지 못했고,

같이 사는 것이 민폐라고 생각하실 어머니께

나와 의지하고 살라는 간절한 바람이었겠지...

그래서 어머니를 남긴 가족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의지했다.


이현이가 태권도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도복을 입고 발차기 연습을 하는 이현이를 보며

'여보, 이현이가 오늘 태권도 다니기 시작했어. 정말 멋있지?'

혼잣말이 일상이 되었다.

그를 그리워했다기보다, 그저 익숙해서.

혼잣말은 여전히 이어졌다.

이제는, 그 말들마저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되었다.


상처받고도 그런 내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나를 망가지게 한 사람을 왜 찾아? 미쳤나 봐.'

'없는 사람 불러서 뭐 해.'

'너 알아서 이제 잘 살아야지.'

그 습관이 튀어나올 때마다 혼잣말이 바뀌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도 달라졌다.


"내가 암만 생각해 봐도

아들이 없는데 며느리집에 얹혀사는 건 좀 그래.

다른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니?"

평소에도 한 번씩 하시던 시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더 나이 들면 놀러 다니지도 못할 텐데,

손주만 보고 있는 것도 좀 그렇고..."


평소 같았으면,

"한 2년만 참아주세요.

이현이가 초등학교만 가도 자유로운 시간이 더 생길 거예요.

그리고 제가 쉬는 날에는 한 번씩 나가시잖아요."

라며 웃으면서 부탁하듯 대답했을 것이다.


이번엔 다르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시선을 아래로 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대답을 이어가셨다.

"이 집 근처에 원룸을 구해서

평소에는 거기서 지내고 애들이 필요할 땐 여기 오고 그럼 안될까?"


나는 차분하게 속마음을 꺼냈다.

"사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섭섭했어요."

아들 보낸 어미 마음에 상처 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왔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매번 생각해 봤는데요...

저는 함께 살고 싶지만, 아니어도 괜찮아요."

용기를 내어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 삶을 먼저 선택하세요.

저는 어쨌든 잘 살아낼 겁니다."

"제 생각에는 고향으로 가셔서 편히 지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솔직한 말이었고,

진심으로 어머니께 그게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더 선택할 시간을 드리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애들 보고 싶으실 땐 편하게 오세요."

천륜을 끊는 게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정중히 말했다.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시며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이제 많이 컸으니까 할머니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지?

할머니가 자주 올게."

라고 하셨고

상황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잘 지낼 수 있어요. 할머니도 여행 가고 해야 우리한테 더 잘해주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평소에 할머니가 외출하시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교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향으로 가실 거라고 하셨다.

집을 함께 알아보고, 이사 준비를 도왔다.

도하의 사진과 앨범도 이삿짐에 담았다.


사진을 보내며,

남은 정을, 이제는 놓아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조금 쓰렸다.

쓴 음식을 입에 넣은 것처럼 천천히 마음에서 퍼졌다.

'아이들이 아빠의 흔적을 보고 싶으면 나중에 할머니에게 가면 되니까.'

그렇게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자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거리이자,

함께 하기엔 먼 거리였다.


'이렇게 해야 제가 살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감사했습니다.'


이삿짐을 내리고 돌아오는 길,

같이 위로하고 조용히 나눴던 배려들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지만,

그냥 기대고 싶었던 날도 있었다.


이건, 시작을 위한 아픔이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만 울자.

그 후엔, 아이들과 나를 살아내야 하니까.


다음 이야기는 6/11(수) 저녁 8시에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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