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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 괜찮은 척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사별 후 배신, 이런 마음 들어도 되나요?

by 새벽달풀

친정 엄마는 매일 나에게 전화를 하신다.

내 목소리가 괜찮아야 마음을 놓으시는 듯했다.

사별한 딸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이 오죽하실까?

(엄마는 멀리 계셔서 1년에 많이 봐야 두 번 정도밖에 못 본다.)

그래서 오늘도, 씩씩한 척을 한다.


"시어머니랑 따로 살기로 했다며?"

"계속 따로 살고 싶다고 하셔서요.

내가 붙잡고 있는 건 도리가 아니니까."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집살이 이제 그만할래요."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시집살이는 시집살이다.

"혹시, 아직도 다른 사람 만날 마음은 없어?

네가 짝이 생기면 엄마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또 그 얘기예요?

엄마 마음 편하자고 제가 연애할 순 없잖아요."

"제 마음이 바뀌면 먼저 말할게요.

그땐, 엄마가 짝지 꼭 찾아주셔야 해요."

"그럼, 말만 해. 꼭 말해."


반복되는 대화 속에서,
내 안에서도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새싹처럼 조용히 움트기 시작했다.


현실의 나는 괜찮지 않았다.

일하고 집에 오면, 있었던 이야기를 나눌 곳이 없다는 사실에 허전함과 외로움이 깊어갔다.

하루 종일 아이와만 대화하다 보니,

내 말투마저 아이처럼 변해가는 듯했다.

아이 봐줄 사람 없이 친구를 만나기도 무리였다.


도하를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도하는 퇴근 후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동료들의 이름까지 기억해 가며 맞장구쳐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습관은,

사별 후 시어머니께 이어졌다.

퇴근 후 집에 가면 몇 시든 거실에 나와 계셨다.

"술 마시고 온 사람 때문에 힘들었겠네."

"그런 사람은 병원에서 안 받아야지."

하시며 대신 맞장구를 쳐 주시기도 했는데...

이제는, 중얼거릴 대상조차 없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집이 무서우리만큼 적막해졌다.

잠든 아이들과 침대 한켠 작은 스탠드,

화장실 불 켜는 스위치 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고요함.

적막함이 싫어 생전 보지 않던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다.

검색어는 사별, 싱글맘, 워킹맘, 상간녀 등이었다.

금방 흥미를 잃었다.


비슷한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해 사별 카페를 뒤적였지만,
나는 애틋함보다 분노가 더 큰 상태였다.

그곳의 슬픈 글들은 오히려 나를 더 허무하게 만들었다.

'나도 애절하고 싶다, '

'사별했는데 여보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그 미움이 돌싱카페를 향하게 했다.

어느덧 남성 프로필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프로필 속 사람과 결혼하면 어떨까? 상상하는 일이 재미있어졌다.

진지해지는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 결국 탈퇴했다.


'그 사람의 프로필이 진짜인지도 모르고,

내가 마음에 든다고 상대도 마음에 든다는 보장도 없이 괜한 기대 하지 말자.'

'아이가 있는데 위험한 행동 하면 안 되지.'

'아무도 이런 나의 모습은 모르겠지?'

사별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뒤늦은 배신을 다 말하고 다닐 수도 없으니 말이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정작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민망했다.


지금의 나는,

두 아들을 홀로 키우며 3교대 근무를 하는 워킹맘.


나 같은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그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결국, 잘 살거라는 큰소리와는 달리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내가 죄짓는 것도 아니고 솔직해지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다시 주어진 인생,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지.'

'내가 우선 나다움을 찾고 그 후에 애들을 케어할 수 있는 거야.'

'그나저나 난 정말 다른 이를 만나고 싶은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소개라도 받아보고 싶었다.

엄마 생각이 났지만,

자신만만했던 내 모습이 마음에 걸려 쉽게 전화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엄마는 내 편일 거야.'


"엄마, 있잖아요. 저 누구라도 만나 볼게요."

엄마는 조심히 다 들리게 웃으셨다.

"왜에? 이제 외롭더나?"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저항하고 싶었지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랑 비슷한 사람은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나,

엄마는 나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 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알아볼게."

엄마의 목소리에는 안심과 걱정이 배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계속 혼자 공허해지고 있기엔 나답지 않은 것 같았다.

'누가 뭐라 하든 말든, 나를 대신 살아줄 사람도 없는데.'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데만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여러 감정들이 뒤엉켜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멀찍이서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움을 방치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 어딘가에서 누굴 만날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 하나쯤은 품고 싶었다.


운동해서 예뻐지고, 책 읽으며 지적인 나로 다듬어 가자.


'없으면 어때. 못 만나면 어때.'


오늘도, 그렇게 한 걸음 내딛는다.

그 걸음이 어디로 향하든, 이제는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음 이야기는 6/15(일) 저녁 8시에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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