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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사랑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들

돌싱의 연애, 감정보다 중요한 이야기

by 새벽달풀

오늘도 늦은 밤, 아이가 잠든 후에야 그와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그의 마음이 너무 궁금했다.

걱정스러운 속내를 숨긴 채,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씨는...

재혼, 어떻게 생각해?"

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우리는 갑자기 아주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처음 꺼내는 이야기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되물었다.
"음... 그럼 서윤이는 재혼하고 싶어?"

"응. 그냥 연애만 하는 건 아이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져서."


그는 한 박자 쉬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난... 은채를 키워야 해."

무슨 뜻인지 혼란스러웠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걸까.
순간, 그의 의도가 헷갈렸다.

"딸에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수도 있지 않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미안해.
난 은채를 다 키워놓고 결혼하고 싶어.
너도 아들 둘 잘 키워놓고...
그때, 결혼하면 안 될까?"

그의 목소리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 마음속 희망도 함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은채의 엄마는 이미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면접 다녀온 아이가 '삼촌과 놀러 갔다'라고 말했단다.

현재는 그 일로 은채가 받을 상처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있었다.
이혼한 일이 너무 미안해서,
‘아빠만큼은 언제나 네가 제일 먼저야.’
그 믿음을 주고 싶어 했다.


그의 진심을 알고 나니,
나는 더 이상 내 마음을 강요할 수 없었다.

한쪽 마음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대한 연민과 씁쓸함이 뒤섞여 밀려왔다.


나는 ‘좋아하면 함께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그건 어쩌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그냥 만나자.
먼 미래까지 벌써부터 생각하지 말고...
헤어지면 어떻게 살아."

현재의 애절한 말이 오히려 더 가슴 아팠다.


돌싱의 만남은 대부분 재혼이나 연애를 위한 것이지만,

미처 떠올리지 못했던 선택지가 있었다.

아이를 다 키운 뒤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사랑.


그와 나의 마음이 다름을 알았지만,
그 따뜻함과 대화가 좋아서
아이들 크는 동안 '그냥 만나기만 할 수 있을까' 고민도 해봤다.

여러 번 조심스레 결혼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며 설득해보기도 했지만,
그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의 사랑 방식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났다.
무너지지 않으려 애썼지만, 가장 먼저 흔들린 건 내 마음이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이준과 이현이를 누구와도 바꿀 수 없으니까.

어쩌면 나는,
그의 은채에 대한 마음을
그 책임감을
질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만 연락하는 거야.’
스스로를 타이르며 불편한 만남을 이어 갔지만,

어느 순간,
그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속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어린 나 자신이 보여 더 슬펐다.


은채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이준과 이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잊고 있었던 이준이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잘해주는 괜찮은 사람.’

순간,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용기 내어 마음을 전했다.

"현재 씨,
은채를 혼자 잘 키우기로 한 그 마음, 응원해.
나는 이번에, 아이도 삶도 함께 나눌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아픔은 지나가겠지만, 후회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너무 고마웠고, 진심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


서로를 놓지 못해 힘들어했다.

현재는 매일 밤 울면서 전화를 했고

나는 폰을 꺼내 들었다가 조용히 내려놓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결심 끝에,

그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모든 연락 수단을 차단했다.
그래야 다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시는, 내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도록.

머리는 헤어졌지만,
마음은 자꾸 뒤돌아보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어서.


이별하고 나니,
이준과 이현에게 더 미안해졌다.

아이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엄마로서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번 아픔으로 가슴에 진하게 새긴 말.

다음에 누굴 만나게 된다면,
첫째, 나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둘째, 반드시 자연스럽게 아이를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여자로, 엄마로,
중심을 딱 잡고 서 있으려 한다.

다시 상처받지 않도록.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마주할 때엔
더 단단해진 내가 있기를 바라며.


사랑은 언젠가 지나간다.

그 후엔 책임만이 남는다.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사랑일 테니까.



다음 이야기는 7/1(화) 저녁 8시에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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