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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그 아이의 엄마는 내가 아니기에

연애와 가족 사이, 선명해진 경계선

by 새벽달풀

아이들이 잠든 밤, 나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던 벨 소리가 울리고

조용히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현재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 하나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오늘 잘 지냈어?

아... 자기가 보고 싶다.

지금 함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자꾸 네가 더 좋아지는 것 같아.

어떡하지?"

현재의 이런 귀여운 말들이 내 마음을 더 그에게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통화 말고, 진짜 함께.'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말하지 않아도 그려질 만큼 익숙해졌고,

어느새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통화는 따뜻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런 생각의 끝에서 문득 은채가 떠올랐다.

"나 은채 만나보고 싶어.

현재 씨 눈 닮았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

언제 보여줄 거야?"

......

그는 3초 정도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뭔가 불안한 기운이 스며들려는 찰나, 그가 말했다.


"은채를 보여주는 건… 좀 곤란해."

그 망설임 끝의 그 말이, 내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건드렸다.

‘진짜 속마음은 뭘까.’

조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다시 물었다.

"어차피 만나게 될 텐데, 아빠 친구라고 하면 안 될까?"

"은채는 엄마가 있잖아. 어린 나이에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미안해."

가까워졌던 마음 사이로 갑작스레 벽이 생긴 기분이었다.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혹시, ‘그는 여전히 혼자서 걸어갈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 문제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에도 어른보다 아이가 중요하다.

섭섭했지만 쿨한 척 말했다.

"난 그냥... 은채 보고 싶다고 말한 거야."

어쩌면 그 순간부터,

‘나는 은채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채는 엄마가 있다."

그의 그 말 한마디가, 우리 사이에 처음 생긴 금이었다.

보이지 않던 선이, 이제는 선명해졌다.

이혼과 사별. 그 경계의 간극이 깊게 느껴졌다.


며칠 동안 아무 일 없던 듯 흘러갔지만,

내 안에서는 생각들이 얽히고 있었다.

'이렇게 연애만 해도 괜찮을까?'

'이건 결국 나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거잖아.'

그와 영화를 보던 날,

어린이집에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그때 이현이 나를 바라보던 서운한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쪼개가며 데이트하고 통화하면서도,

숨긴 채 연애를 이어가는 내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재혼을 한다면, 최소한 ‘가정’을 보여줄 수 있다.

아빠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조금은 안정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비밀’이 아닌 관계로 존재하는 것.

물론, 재혼한 부부가 아이를 함께 키워나가는 건 어렵겠지만,

그 시간을 함께 견뎌낼 수만 있다면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던 어느 날,
문득 내 마음속, 선명한 소리를 들었다.

“나는 재혼을 하고 싶다.”

사랑만이 아닌, 함께 견뎌낼 사람과.


그런데 그는, 나와 함께 걸을 마음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음 이야기는 6/28(토) 저녁 8시에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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