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철학 ⑬] 막 배

비겁한 권력에 맞선 차가운 기록

by 자아

사고 직후, 나는 평소처럼 나 자신에게 주문을 외웠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내일이면 다시 보일 거야." 그것은 나의 고집이었고, 강해야만 한다는 강박이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주 단위로 시간이 흘러도 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는 매 순간 나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티는 것이 답이 아님을 말이다. 그렇게 4월 3일 나는 회사에 병원 진료 후 긴급하선을 요청하게 된다.


1. 180도의 변신: 진단서 한 장의 무게

병원에 가기 불과 한 시간 전, 기관장과 선장은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인사 고과를 내밀었다. 10년 넘게 이 바닥에서 쌓아온 나의 헌신이 비겁한 펜 끝에 유린당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기관장은 나와 2주도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일을 하였기 때문에, 회사규정상 고과를 줄 수 없을에도 불고하고, 눈을 다쳐 시력이 온전치 않은 부하 직원을 두고, 그들은 위로는커녕 사고의 책임을 회피하고 나를 폄훼하기 위한 서류상의 장난질에 몰두했다

하지만 반전은 병원을 다녀온 뒤에 일어났다. 의사로부터 '근무 불가(No fit to work)' 판정이 담긴 진단서를 받아 들고 오자, 한 시간 전까지 나를 압박하던 그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법적 책임과 본사의 눈치가 두려워진 그들은 갑자기 친절한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은 사라지고 오직 자기 안위만을 계산하는 그들의 위선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인류애가 상실되는 참담함을 느꼈다.


2. 분노 끝에 찾아온 차가운 이성: 팩트로 조지다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나를 안전하게 하선시키는 데만 집중했다면, 나는 결코 그들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비겁함은 내 안에 미칠듯한 분노를 일깨웠다. 뜨거운 분노가 온몸을 감싸고 난 뒤, 역설적으로 차분해졌다. 감정이 아닌 오직 '팩트'로 그들을 압도해야 할 시간임을 직감했다.

나는 선장과 기관장을 불러 앉히고, 사고 이후 그들이 책임지지 않기 위해 나에게 했던 비겁한 행동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논리적인 팩트 앞에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항만국통제(PSC) 호출이라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하자,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3. 홀가분한 이별: 새로운 항로를 향한 확신

솔직히 이 사건을 겪으며 나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행복했기에, 어쩌면 10년의 관성을 끊어내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에서 목격한 부조리와 인류애의 상실은 역설적으로 내 다음 항로인 싱가포르에서 기술감독으로 이직이라는 결정을 너무나 쉽고 명확하게 만들어 주었다.


성취와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바다였지만, 이제는 미련 없이 닻을 올릴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이번 사건은 나를 멈추게 한 재앙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신호였다.

나는 이제 상처를 뒤로하고, 내가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현장으로 기쁘게 발을 내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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