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치유] 지금 나를 만나러 갑니다
※ 책에 나오는 ‘주치의’는 과거 치료받았던 정신과 의사이며 주치의와의 대화 내용은 주치의의 허락하에 진료과정을 녹음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 불면증에 관한 정신과 진료 녹음 파일 -
나> 그때도 얘기 한 적 있었는데 사실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어요. 누차 얘기를 했었는데.
주치의> 네.
나> 앞으로 잘 잘 까요?
주치의> (빵 터짐)
나> 아니. ㅠ 사실 못 자는 날이 너무 많으니깐..ㅠㅠ
주치의> 으음.
나> 저는 세상에서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이 참 부럽거든요.
주치의> 그것도 지금 봐요. 왜 그 질문을 했을까?
나> 잘 자고 싶은데.
주치의> 잘 자고 못 자고 기준이 뭘까요?
나> 기준요?
주치의> 네.
나> 짧은 시간을 자더라도 숙면을 취해서 개운한 기분이 드는 거.
주치의> 오케이. 짧은 시간을 자더라도 숙면을 취한다는 것. 숙면을 취하게 되면 주변 상황을 모르게 되죠?
나> 네
주치의> 해리*죠.
* 해리(dissociation, 解離);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면 고통을 의식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인격을 분할하는 현상. 연구 결과에 의하면 트라우마가 끔찍할수록 오래 지속될수록 그리고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이 어린아이일수록 해리가 심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나> 네
주치의> 자연스러운 해리입니다. 현실을 안 보고 싶은 거예요.
나> (놀라며) 자고 싶다가요??!!
주치의> 현실을 안 보고 싶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싶은 거예요. 과거든 뭐든.
나> 아! 잘 자고 싶다는 제 무의식에 그게 깔려 있다는 거예요?
주치의> 본질이 그겁니다.
나> 아..
주치의> 과거의 기억이든 앞으로의 걱정이든 현재의 갈등이든.
나> 맞아요!
주치의> 단 한순간이라도 그 생각을 좀 안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능동적인 해리고. 그게 수면이고. 그게 방금 물어보신 (질문의) 본질입니다.
나> 음... 거의 집착하다시피 잘 자고 싶다 잘 자고 싶다 하거든요. 남들은 그냥 못 자면 그만이잖아요?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요. <잠을 잘 자야 된다>에.
주치의> 그만큼 불안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자살하는 이유가 그거잖아요? 자살해 버리면.. 그래서 lest in peace
나> 맞아요. 응. 응. 진짜. 그래서 샘한테 그때도 얘기했는데 자고 있는 사이에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던 게. 죽어서 모든 게 다 끝났으면 좋겠다고.
주치의> 자살이 정말로 해리의 끝판왕이죠.
나> 그 생각을 벗어나는 게 잠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잠에 대해서 집착을 했던 것 같아요.
주치의> 그렇죠.
나> 어.. 그럼 내가 ‘잠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다’라는 생각만 갖고 있으면 되겠네요?
주치의> 네. 방금 말씀 나눴던 것처럼 그게 사실은 껍데기는 잠이지만 속으로는 잠이 아니고 오히려 그냥 아무 생각을, 모든 걸 지우고 싶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해리의 욕구죠.
나> (읊조리듯) 해리의 욕구.. 그런 해리의 욕구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주치의> 네
내 오랜 불면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고 평생 잠을 잘 자본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릴 때 늘 수면 공포에 시달렸고 불면증은 마치 불치병처럼 여겨졌다. 수면장애 호소를 주치의에게 자주 했었다. 정신과 상담을 통해서 과거의 퍼즐을 맞추어 가고 있을 때쯤 내 불면증에 대한 해답도 찾은 날이었다. 지금도 난 여전히 잠을 못 잔다. 그렇지만 잠을 못 자는 것에 대한 집착은 하지 않는다. 이유를 알았으니 잘 자면 좋고 못 자도 그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