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심연]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다
※ 책에 나오는 ‘주치의’는 과거 치료받았던 정신과 의사이며 주치의와의 대화 내용은 주치의의 허락하에 진료과정을 녹음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정신과 주치의> 어릴 적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분들은 수치심에 굉장히 취약하거든요. 부모의 학대나 방임에 장기간 노출되면 마음속에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일종의 무가치감이 싹터요. 결국엔 부적절한 수치심을 갖게 되는데 이와 동반되는 무력감 또한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주치의의 녹음 파일을 분석해 보면 주치의가 내게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 바로 감정에 대한 얘기이다. '부적절한 ○○감정'이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했으며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시켜 주려 했었다.
내가 고통받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느끼는 감정 때문인데 소위 '부적절한 감정'으로 인해 각종 신체 호소 증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상담치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핵심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뿌리 깊게 박힌 핵심 감정은 6세 이전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이고 이는 정신분석 치료로도 쉽지 않다고 한다. 거의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것이 잔상일지, 착각 일지, 진실 여부를 검증할 수는 없지만 나는 4세 경의 최초의 기억*을 갖고 있다. 물론 부정적인 기억*과 감각 경험이다.
* 최초의 기억: 심리학계에서는 사람이 떠올릴 수 있는 생애 최초의 기억을 평균 3~4살 사이로 본다고 한다.
* 부정적인 기억: 우리는 생존 본능 때문에 부정적인 기억일수록 잘 기억해 두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책에서 언급했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은 ‘기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나이 때부터 기억하고 있는 4세 이후의 기억이다. 그러나 0세 ~ 4세 이전까지 이 집에서,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굳이 기억나지 않아도 예측 가능했다. 심각한 소아 우울증과 불안 증세를 보였을 것이다.
내 얘기가 너무 비관적인가?
그러나 희망은 있다.
정신의학과 과학 공부가 내게 준 교훈이 있다.
첫째, 6개월이면 원자(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가진 최소 단위체)의 눈으로 보면 나는 이미 다른 생명체나 다름없다는 것. 6개월이면 모든 세포가 리셋(reset) 된다는 의학적 사실은 내게 희망을 주었다. 우리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시킬 수 있다.' 불교 사상의 핵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불교 이야기 때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둘째, 죽을 때까지 뇌 회로를 바꿀 수 있다는 것.
변하고자 하는 동기만 있다면 우리는 뇌를 바꿀 수 있다. 변화고 자 하는 동기는 여러 요인에 의해 이뤄질 수 있지만 정신과 약물은 없던 동기도 만들어 준다.
이런 의학적 팩트는 내가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내 상태는 완치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또한 내가 겪은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도 없다.
그러나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이건 팩트다.
정신과 주치의> 공황발작은 모순된 감정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지 않을 때 나타나요. 인간의 모든 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고인 물처럼 썩습니다. 잘 살펴보면 자신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사람은 상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안의 가혹한 심판관을 자비로운 변호사로 바꿔야 할 때입니다. 트라우마는 현실감을 부여하는 좌뇌와 전뇌의 영역까지 마비시키는데 진정한 용기는 내면의 불안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생겨나요. 자신의 행동과 감정에 너무 선악의 잣대만 대지 마시고 흐르는 물처럼 자신의 모습 또한 시시각각 역동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영원한 나도 없고 변함없는 너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