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심연]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다
※ 책에 나오는 ‘주치의’는 과거 치료받았던 정신과 의사이며 주치의와의 대화 내용은 주치의의 허락하에 진료과정을 녹음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의존’은 치료자와 내담자 사이 라포 형성과 심리치료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장치이지만 치료 종결 시에는 방해가 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치료 종결 시에 '종결에 따른 저항'을 다룰 수밖에 없는데 독립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자립해 나가야 하는 내담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 부분에서 난 적절히 다뤄지지 못했다.
살면서 응급 상황은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일이며 명의만 찾아다니며 죽어가는 내 모습을 손 놓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집 근처에서 약만 타던 정신과 의사로부터 ‘정신분석적 정신 치료’를 권유받았고 나는 '정신분석적 정신 치료'로 2차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예비 세션에서 앵무새처럼 나에 대한 역사 리바이벌(revival)이 시작되었다. 치료자가 치료를 하려면 나에 대한 여러 측면에서의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예비 세션은 그야말로 ‘나’라는 사람의 일방적인 역사 수업 진행과도 같은 일이었다. 정신과 경력(?)이 있던 터라 예비 세션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다. 본 세션에서 의사가 말을 안 한다. 물어도 중립만 지키며 질문을 반사시킨다. 나만 지낀다. 마치 감정적인 반응이 없는 AI와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몇 달이 흐르고 본 세션을 진행하던 어느 날, 전광석화처럼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내 심리적 고통의 마지막 원인이 퍼즐처럼 맞춰지던 순간, 나는 치료를 중단했다. 의사는 내가 왜 치료를 중단했는지 모른다. 치료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치료자는 정신 치료에서 ‘절제’, ‘중립성’, ‘익명성’의 규칙을 지킨다. 분석가가 중립을 지켜야만 가능한 그런 치료, 그러나 내가 그런 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치료받고 싶은 욕구보다 나와 함께 이 지랄맞은 세상을 욕하고 싸우며 ‘연대해 줄 의사’를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다.
체감하든 체감하지 못하든 변한다는 사실 정신과 병원은 내가 살면서 가장 안전하다고 느꼈던 공간이었고 정신과 상담은 매일 해도 좋을 만큼 푹 빠져 있었다. 정신과 의사에 대한 호불호는 있어도 진료만큼은 단 한순간도 싫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 내게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정신과 상담이요’라고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은 내 인생의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정신과를 다니면서 나는 내 병의 근본 원인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알았다고 모든 것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었다. 원인과 치료는 ‘별개의 문제’이다.
나> 선생님. 저 초진 때 어땠어요?
과거 정신과 주치의> 구원하는 느낌이었어요. 이 사람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수렁에서) 끄집어 내야겠다...
치료 종결 후 수퍼비전 당시
과거 정신과 주치의> 요즘 네오 님 보면 제일 뿌듯합니다.(미소)
체감하든 체감하지 못하든 어떤 식으로든 변화는 일어난다. 초진 때의 나와 치료 종결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모두 다른 사람이다. 나는 앞으로도 정신과를 다닐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양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메디컬적인 요소(약물치료)는 현대 정신 의학에서 최선의 조치이며 암 환자가 꾸준한 항암치료를 받듯이 ‘마음 관리’는 재발 방지를 위해 사전 예방이 늘 중요한 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