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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모성을 의심하는 당신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그래서 더 힘든 어떤 날

“엄마는 너를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야.”

“엄마는 네가 없으면 안 돼.”

“엄마는 너를 위해 다 희생했는데…”


이런 말,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으시죠? 어린 시절엔 이 말이 ‘사랑의 표현’처럼 들렸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들으면 어쩐지 마음이 뻐근해집니다. 그 말이 주는 무게가 감정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요.


디즈니 영화 Into the Woods 속 라푼젤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탑 속에 갇힌 라푼젤에게 마녀엄마는 끊임없이 말합니다.

“밖은 위험해. 널 지켜주고 싶어.”

하지만 아이를 지키려는 그 말은, 결국 자신의 외로움과 상실을 감추기 위한 통제였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마녀의 사랑은 보호라는 이름을 입고 있었지만, 결국 라푼젤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 감정의 족쇄였죠.


이 장면은 비단 동화 속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엄마들이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비슷한 모성의 감정 고리를 경험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통제하고, 자녀의 반응에 감정적으로 휘청이며,

“나는 왜 이렇게까지 반응하지?”

자신의 모성을 의심하는 순간을 맞이하곤 합니다.


상담실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입니다.

“그날, 아이한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화를 참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서럽고 억울했어요.”

많은 엄마들은 자녀와의 관계에서 감정의 트리거(trigger)를 경험합니다. ‘트리거’란, 과거의 감정이 현재 자극에 의해 강하게 되살아나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마치 내 감정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처럼, 예상보다 훨씬 강한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아이가 “싫어!” 하고 말한 순간, 내가 거절당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분노나 상실감이 폭발하거나,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면 나도 함께 울컥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 감정은 대부분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충분히 공감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나’ 때문입니다.


눈치를 보며 자랐던 기억,

내 감정을 표현하면 혼났던 순간,

무시당했던 상처들이

지금 이 아이의 말투, 행동에 ‘덧씌워져서’

내 감정이 과잉 반응하도록 하는 거죠.


그래서 상담실에서

“나는 우리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어느 날 그토록 닮기 싫었던 엄마의 말투와 얼굴을 한 나를 발견했어요.”

이런 고백이 참 많습니다. 저도 그렇다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전 문학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지금 떠오르는 드라마 『더 글로리』입니다. 그 안에는 정말 다양한 결의 모성이 교차합니다. 세대 간에 전이되는 상처와 모성의 이중성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기억에 남습니다.


연진모- 가해를 외면하고 묵인하는 모성

연진 - 폭력적 모성을 답습한 딸 연진

연진딸 - 침묵 속에서 자라나는 피해자


연진의 엄마는 딸의 폭력을 덮고, 돈으로 무마하며 키워냅니다. 너만 안 다치면 돼.”라는 태도는 결국 연진의 감정 윤리를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연진은 엄마에게서 배운 방식대로 세상과 사람을 대합니다. 감정을 조작하고, 죄책감을 회피하며, 자기 합리화를 일삼으며 말이죠. 어린 딸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엄마의 행동을 관찰하며 자랍니다. 어떤 이의 개입이 없었다면 집의 공기, 눈빛, 대화 방식은 그대로 전이되겠지요.

문동은의 엄마는 또 얼마나 충격적이었나요.

드라마에서 주인공 문동은을 지지하는 강현남을 떠올려 봅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였지만, 딸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처음엔 무조건 희생적인 남편의 폭력을 견뎌내는 모성이지만, 점점 자기 회복의 모성으로 성장하는 여정이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었지요.


닮기 싫은 부모를 닮아 있는 나

그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과 슬픔,

그리고 그다음에 찾아오는 묘한 해방감

어떤 문장에 내가 연상시키기도 하나요?


모성은 무조건 선한 것이 아닙니다. 모성은 사랑이지만, 그 안에는 외로움, 두려움, 좌절감, 죄책감 같은 다른 감정들도 얽혀 있습니다. 그 감정들을 외면한 채 사랑만을 강조하면, 모성은 자녀를 감싸는 따뜻한 품이 아니라 자녀의 정서를 잠식하는 덫이 되기도 합니다.


우로보로스: 삼켜지는 감정의 고리


모래놀이치료에서 종종 등장하는 상징이 있습니다.

우로보로스(Uroboros) – 자신의 꼬리를 물고 원을 이루는 뱀. 끝과 시작이 맞닿아 있으며, 죽음과 재탄생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이 상징은 ‘모성의 감정’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려는 마음이 실은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하고 싶은 욕망과 맞물려 감정이 서로를 삼켜버리는 거죠.


자녀 양육으로 힘들어하던 내담자는 상담이 종결될 즈음 이런 표현을 남기셨어요.

“내가 아이를 위해 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릴 적 내 감정이 울고 있었던 거 같아요.”

내담자가 모래 상자 위에 우로보로스를 놓는 순간, 조용히 자신의 감정을 마주합니다. 그것이 그녀의 손에 닿었을 때 단지 반복되는 고통의 순환이 아니라, 그 고리를 자각하고 멈출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상징됩니다.


감정의 고리를 들여다보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아이와 나를 살리는 첫걸음이 됩니다.


모성은 신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모성을 ‘숭고하고 위대한 본능’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모성은 상처와 사랑, 기대와 좌절이 함께 얽힌 인간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모성은 신화가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마주해야 하는 삶의 한 장면입니다. 엄마이기 전에 ‘나’로서, 내 감정의 진짜 주인을 알아가는 시간은 모성이 아이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돕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그 과정은 꼭 상담을 통해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색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이야기로,

자기 안의 감정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상담실 안에서든, 일상의 조용한 순간이든 어떤 방식이든, 내 감정의 고리를 바라보는 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고, 아이에게도 자율성과 온기를 함께 주는 엄마로 서게 합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그래서 더 힘든

모성이라는 이름 앞에서 작아졌던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이 글이 그 여정을 시작하는 작은 실마리가 되었길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감정의 고리 안에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당신에게 다정함이 닿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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