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경계선

억울함

왜 나만 나쁜 사람이 되죠?

억울함은 사전적으로는 부당하거나 억압된 상황에서 생기는 울분과 분노로 설명된다.


하지만 상담 장면에서 만나는 억울함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하다.
이 감정은 단순히 ‘화를 참은 상태’나 ‘말 못 한 분노’ 그 이상이다. 억울함은 말할 수 없었던 사람의 고통, 그리고 이해받지 못한 마음의 깊은 고립에서 비롯된다.

“저는 진짜, 아이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어요. 그런데 또 애가 울고, 남편은 저를 혼냈어요. 결국 또 제가 나쁜 엄마가 돼요. 정말 억울해요.”

억울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종종 설명하려 애쓰지만, 그 설명조차 방어처럼 여겨지거나 또 다른 갈등이나 충돌을 불러온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정리한다.


-말해도 소용없어요. 그냥 참는 게 편해요-

하지만 억울함은 참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억울함은 내가 무시당했을 때, 내 마음의 경계가 짓밟혔을 때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정이다.


억울함은 관계 안에서 생긴다. 즉, 억울함은 언제나 관계적인 감정이다. 누군가와의 상호작용 안에서, 나의 의도와 다르게 오해되거나 무시당했을 때, 또는 나름 애썼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냉담하거나 비난일 때 생겨난다. 예컨대 아이를 위해 한 말이 아이에게 상처로 받아들여졌을 때, 배우자를 위해 양보했지만 ‘당신이 문제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친구를 배려했지만 고마움은 커녕 불편하다는 반응을 들었을 때. 억울함은 ‘이해받고 싶다’는 간절한 감정의 실패 경험이 된다.

억울함은 입 밖으로 꺼내 말로 표현하기 참으로 어려운 감정이다. 독자분들도 끄덕끄덕 하실지 모르겠다. 왜일까? 억울함 속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억울함은 복합적이고도 다차원적인 모양의 감정 같다.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겹겹이 숨어 있다.

+ 슬픔:

나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는 상실감

+ 분노:

오해하거나 함부로 판단한 타인에 대한 화

+두려움:

말하면 관계가 틀어질까 봐 차마 꺼내지 못한 감정

+수치심: 설명해도 믿어주지 않았던 반복된 경험에서 비롯된 자기 의심

+사랑:

그 관계를 지키고 싶어서, 상처를 감춘 마음


억울함은 이렇게 표면에선 분노와 비슷한 모양 같지만, 실제로는 이해받고 싶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깊은 애착의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억울함은 관계 안에서 생기고, 관계 안에서만 회복될 수 있다. 억울함을 가장 많이 느끼는 사람은... 아니 조금 더 설명하면 억울함으로 인해 내 속의 에너지를 긁어내고 있는,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특히 가족 안에서 ‘착한 아이’, ‘배려하는 사람’, ‘분위기를 깨지 않는 사람’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자란 경우,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자신도 모르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억울해도 침묵하고, 상처받아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들은 억울함을 참으며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억울함은 내가 나를 무시하게 만드는 감정으로도 확장된다. 그래서 참고 참는다.

하지만 억울함을 감추는 일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 감정을 들여다보고, 안전한 관계 안에서 말해볼 수 있어야 비로소 억울함은 나를 갉아 먹는 감정이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는 감정이 된다. 억울함을 마주하는 일은 곧 나의 내면을 정리하는 작업이다.(모든 감정이 그러하겠지만)


이전 글에 언급한 적 있듯, 모든 감정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받았다는 신호이자, 내가 사랑을 원했다는 증거이며, 더는 관계 안에서 나를 지우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내 마음을 설명할 자격이 있어요.”
“이번엔 나를 위해 말하고 싶어요.”

앞에 억울함으로 삶이, 관계가 흔들린다면 무너진 ‘나의 경계’를 점검해야 한다. 그 무너짐 안에서 억울함이 새어 나와 나를 지배하게 된다. 예를 들어 가족 안에서 한 사람이 특정 역할을 반복해서 맡게 되면, 그 사람의 ‘진짜 감정’은 종종 기대나 역할 뒤에 묻히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엄마는 아이를 위해 나의 일부를 포기한 듯 헌신하며 애쓰지만, 그 노력의 끝에는 종종 ‘너무 예민하다, 화를 너무 낸다, 애 좀 그만 혼내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참고 양보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왜 항상 내가 문제처럼 보이지?’라는 질문에 이르게 된다. 이 억울함은 곧 ‘나의 감정과 생각, 반응은 타인과 분리된 독립된 것이며,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기 경계가 무시되었을 때 생겨난다. 가족상담이론에서 말하는 바로 ‘자기 분화’와 관련 된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이론에서는 분화가 낮을수록 우리는 타인의 기대와 감정, 판단에 휘둘리며 내가 느끼는 감정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내가 열심히 수행한 역할 자체가 내가 된 것이다. 내 마음은 부재된 채 살아가는데 계속 요구받고 지적받는다. 혹은 반대로 사람들 사이에 ‘좋은 사람’이 되는데 익숙하지만, 내 마음은 구멍이 생긴 듯 허전하다.
가족에서, 일터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늘 중재하거나 책임지는 사람. 하지만 어느 순간 종종 ‘나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을 삶을 맞이한다. 역할은 수행하지만, 마음은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는 것.
억울함은 바로 이 간극에서 생겨난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보이는’ 고립된 감정. ‘말해도 듣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던’ 쓸쓸한 감정.


억울함은 위험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로 살아가고 싶다는 신호다.

“나는 지금 존중받고 싶어요.”
“나는 억울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내 입장도 들어주세요.”

이 마음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더 이상 억울함에 내 삶과 마음이 삼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억울함을 통해 경계를 세우고, 분화된 자아로 성장하는 길을 걷게 된다.


만약 관계 안에서 억울함을 품고 계속 교류한다면?


1. 표면은 평온, 속은 불편한 '감정의 이중구조'

겉으로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서운함, 분노, 무시당한 감각, 왜곡된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채 눌려 있다 보면 점점 감정에 진심을 실을 수 없게 되고 상대와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하지만 겉으로는 관계를 유지하므로, 진짜 갈등은 드러나지 않고 내부에 쌓여 관계의 정서적 불균형을 만성화시키고, 때로는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별, 절연, 혹은 감정 폭발로 이어질 수 있다.

2. 관계 속에서 '억울함'이 역할화되면

억울함이 반복되는 관계 안에서는 그 사람이 특정한 고정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언제나 책임지는 사람, 매번 상황을 정리해 주는 사람, 참는 사람, 양보하는 사람

이 고정된 역할의 억울함은 인격화되고, 그 관계에서는 더 이상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결국 그 관계는 더 이상 성장하거나 회복되지 못하는 구조가 되어 버린다. 억울함은 그 자체보다, 표현되지 않고 고착되는 것이 더 위험하다.

3. 억울함은 감정의 불균형일 뿐 아니라, 권력의 불균형을 드러낸다

억울함이 반복되는 관계는 종종 누군가는 설명할 권리를, 누군가는 오해하거나 판단할 권리를 일방적으로 갖고 있는 관계라는 뜻도 된다. 이 관계는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구조를 가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상사는 함부로 말해도 되지만, 나는 감정을 말할 수 없다/ 부모는 자녀의 감정을 통제하지만, 자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할 수 없다/친구는 내 말은 믿지 않으면서도 본인 입장만 고수한다/ 이럴 때, 억울함은 관계의 권력 구조에 대한 내면의 저항감의 한 조각일 수 있다.

4. 감정의 미해결은 '냉소'나 '관계 회피'로 변형된다

억울함을 해소하지 않은 채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 결국 두 가지 경향으로 흐른다

냉소적 태도: 겉으로는 관계를 이어가지만, 속으로는 ‘어차피 말해봤자’, ‘얘는 늘 이런 식’이라고 단정하며 거리 두기를 한다.

관계 회피: 최소한의 연결만 유지하며, 진짜 정서 교류는 피한다. 감정적 친밀감은 단절된다.

이것은 관계를 생생하게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억울함은 점점 고립과 무기력으로 전이되기 쉽다.

5. 억울함을 품은 채 관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성장할 수는 없다

억울함을 가진 채 어떤 관계는 유지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서로를 성장시키는 건강한 교류가 되기 어렵다. 감정은 누군가의 마음속에만 남겨질 수 없다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억울함이 있는 한, 감정은 그 관계를 해석하는 필터가 되고, 바라보는 안경이 되고, 결국은 상대가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게 되고, 내 감정이 어떤지를 점점 모르게 되는 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런데 부족함과 억울함의 공존하기도 한다. 나도 잘못했지만 억울한 마음이 들 수 있다. 감정 조절, 자기 성찰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경우, 자신의 행동이나 말이 관계에 미친 영향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억울함만을 앞세우는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미완성, 미성숙함으로 표현하면 주변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누군가 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 혹은 ‘자기 합리화’ 가능성도 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즉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덮거나, 타인의 시선을 피해 ‘내 억울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닌가 점검해봐야 한다. 이것이 꼭 잘못이라는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 역시 감정 표현의 미성숙에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어떤 감정을 억울함이라는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아닐까?

그 감정 자체는 나름의 의미와 신호를 담고 있다. 결국, ‘나의 부족한 부분’을 직면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억울함이라는 감정도 점차 성숙하고 건강하게 다뤄질 수 있다. 억울함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정당화하지 하지 말고 억울함 뒤에 숨겨진 자기 방어, 성장의 욕구, 그리고 관계에서 느끼는 고통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혼자가 어렵다면,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 부족함으로 인해 느끼는 억울함도 정당한 감정이긴 하다.


어쩌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은 ‘진짜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 안에는 성장의 가능성도 있고, 미숙함도 있다.

이 감정을 느끼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 나는 지금 어떤 역할로만 이해되고 있지 않나요?

+ 나의 억울함은 어느 순간부터 쌓여왔을까요?

+ 내가 내 감정을 설명해도 괜찮은 안전한 관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 억울함을 말할 때, 나는 어떤 두려움을 마주하나요?


정리하면 억울함을 자주 느끼는 사람들의 핵심 고통은 진심이 왜곡되는 경험이다. 이 감정은 본질적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무시, 오해, 고립을 경험한 사람의 내면에서 생겨나며, 타인과 연결되고 싶지만 표현할 언어와 통로를 잃어버린 채 혼자가 되어버린 마음의 자리다.
그 감정을 품은 채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일은, 사실상 내 마음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억울함은 반드시 존중 속에 말해져야 한다.


“왜 나만 나쁜 사람이 되죠?”
이 질문은 결국,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인정받고 싶어요’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내가 내 목소리를 찾아 내 입장을 설명하고,

내가 존중받을 수 있는 경계를 확실히 할 수 있기를

내가 나를 아끼는 감각을 찾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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