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가능성

기대감


“나한테 기대하지 마.”

그 말이 서운했다.

기대를 하지 말라는데,

그럼 나는 뭘로 이 관계를 이어가야 하지?


관계는 결국 기대와 실망 사이의 진자운동 같다.

가깝기에 더 바라고, 바랐기에 더 실망한다.

그래도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건,

그 실망 안에 여전히 기다림과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대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누군가 대부분

이미 여러 번 기대해 본 사람의 외침이다.

믿고 싶었고, 바랐고 그러나 실망했던.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기대감은 감정이 아니라 ‘관계의 구조’다


자녀나 배우자 갈등 관련 상담 장면에서 자주 만나는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이 ‘기대감’이다.

그것은 단순히 욕구나 원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어떤 틀로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거 같다.


정신분석에서는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내면화된 대상표상(object representation)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는 지금 눈앞의 상대를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과거 내가 중요한 대상과의 맺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의 상대와의 관계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늘 엄마가 먼저 알아차려주길 바랐던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연인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말 안 해도’ 알아차려주길 기대한다.


그 기대는 오래된 내 안의 감정기억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관계를 통해 어떻게 사랑을 주고받는지를 예상케 한다.

처음 공부할 때는 이것을 부정하고 싶기도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부인할 수 없는 진리 같다.


그런데 말하지 않는 기대가 관계를 흔들기 시작한다.

문제는 기대 자체보다,

그것이 언어화되지 않고 쌓일 때 생긴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실망으로 무너질 때,

사람은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혼란을 느낀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걸까.’

‘아니, 이건 정말 기본 아닌가?’


이 감정의 이름은 서운함이기도 하고, 억울함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은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기대가 좌절될 때 생기는 정서적 고통은, 단순한 욕구불만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가에 대한 해석과 바로 연결되어 참 아프게 한다.


애착이론에서 말하듯, 우리는 안전한 관계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해도 괜찮다는 경험을 통해 정서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기대만 커질 때, 실망과 오해로 자신을 감춘다.


관계라는 건 결국 ‘기대감’의 연속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 안에서,

크든 작든 서로를 향해 기대한다.

말해주길 기대하고,

알아주길 기대하고,

기억해 주길 기대한다.


기대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자라는데,

그 기대가 말로 표현되진 않기에

서로는 자주 엇갈린다.


기대는 때때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그 기대가 어긋날 때 생기는 감정의 진자운동이

곧 ‘원망’이라는 이름의 응어리가 된다.


기대를 접는다는 건,

마음을 거두는 일이다.

기대를 말한다는 건,

관계를 믿는다는 신호다.


그래서 사람은,

기대하면서 실망하고,

실망하면서도 여전히 기대하며,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관계에서 기대란, 결국 ‘내 방식의 사랑’을 상대도 그대로 되돌려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 다름은 때로 충돌을 일으킨다.


그래서 기대는, 말해보는 용기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서로 다름을 마주하는 진짜 관계의 출발점이다. 기대는 관계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기대가 좌절될 때, ‘다음부터는 기대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기보다 두드려 보고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상담에서 자주 목격하게 되는 건, 기대를 내려놓는다고 해서 감정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대를 표현하지 않으면 감정은 오히려 더 깊이 고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작은 일에 감정이 폭발하거나, 관계 자체를 포기해 버리는 선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대는 잘못된 게 아니다. 다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꺼내놓을 수 있는 관계인지, 서로의 차이를 조율할 수 있는 안전한 장인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걸 바라는데 아마 그 사람과 더 연결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지 않은 기대가 무너진 채 쌓이는 관계보다,

말해보는 용기로

한 걸음 다가가는 관계를 맺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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